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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Oct 24. 2024

우린 조금 더 섬세하고
예민해져야 할지도 몰라요

청소년 우울, 청소년 자살에 관하여


 

글을 시작하기 전 미리 언급한다. 네가 경찰서에서만 아이들을 만나니까 (소위) 안 좋은 상황의 아이들 뿐이라서 그런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 대부분의 아이들은 잘만 살고 있는데 왜 자꾸 자살이나 우울 타령이냐, 우리 아이는 밝고 문제없으니 하등 들을 필요 없다... 쉽게 단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다. 실제 통계 자료가 십 대의 자살 위험을 끝없이 경고하고 있고, 객관적인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아이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 환경과 조건, 그리고 내면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겉으로 보이는, 특히 부모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아이가 가진 무수한 가면들 중 하나일 뿐이므로 부모니까 내 자식을 훤히 다 안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왜 자꾸만 죽음을 떠올릴까. 이유는 다양하다. 어른도 아니고 소년도 아닌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가는 중간 단계에 머무르는 청소년들. 2차 성징으로 말미암아 신체 및 생리학적으로 겪는 급격한 변화에 더불어 정신적으로도 끝없이 요동치는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 사춘기이다.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며 정체감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지만 좀처럼 출구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이 시기 아이들은 부모나 어른들과 끝없이 충돌하기도 하고, 불건전한 교우관계를 형성하기도 하며, 섭식장애나 비행 혹은 등교 거부 등 다양한 위기에 봉착한다. 그 사이 언제고 죽음이 끼어든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특히 부정적 환경(가정 문제, 또래 집단 문제, 비행 환경, 고립된 생활 등)에 노출된 아이들일수록 특히 죽음을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율성(통제감)인데, 아이들은 그 속에서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지옥 같은 현실 앞에서 아이들은 죽음을 떠올린다. 스스로의 목숨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이 된다. 자신의 목숨 외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 반문하는 분들이 있겠다, 그런 환경에 놓이지도 않았는데 쟤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거냐고. 뭐가 문제여서 그러는 거냐고.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첫 째, 아이 내면의 문제다. 이쯤에서 청소년 우울 및 양극성 장애에 관해 짚고 넘어가야겠다. 성인의 우울에 대한 막연한 틀(에너지 감소, 우울한 감정의 지속, 무기력함, 불면, 식욕 감퇴)만으로 청소년의 우울에 똑같이 접근해 버리면 알아채기 힘든 단서들이 많다. 청소년 기분 장애는 스펙트럼이 몹시 넓다. 그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표면적인 증상이나 행동양상만으로만 접근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품행 장애, 주의 산만, 학습 부진, 비행으로 납작하게 이해해 버리기 쉽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결과물 말고 그 출발지점까지 끈질기게 추적해야 한다. 모든 문제 행동의 출발에 우울이 버티고 있을 가능성도 꽤 높다. 둘째, 당신은 아이를 잘 모르는 부모(어른)이다. 아이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서 가장 괴로운지,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등등 면밀히 살피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의식주를 챙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 외에 아이의 '고민'과 '마음의 병' 양면 모두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이야기 어디서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소위 엄친아로 불리던 아이, 늘 밝고 모범적인 모습으로 인기도 많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던 멋진 아이. 어느 날 갑자기 돌연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유서 한 장 남겨두고 투신 자살 했더라는 이야기 말이다. 그 아이가 실시간으로 무너져 내리던 순간에 썩은 동아줄마저 없었을, 쓸쓸하고 황량한 마음을 짐작하다 보면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엄마, 우리 반에 왕따 당하는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말문을 열었다. 부모로서 뜨악한 마음이 먼저 올라온다. 내 아이부터 지키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문제 해결책이랍시고 이런 답을 해 버렸다. "아이고, 괜히 돕다가 너까지 휘말리지 마. 때로는 적당히 모른 척하는 것도 방법이야." 그 다음 날, 아이가 스스로 죽어버렸다. (그나마 아이들이 뭐든 말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아이들이 어른 앞에서 이건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말을 꺼내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우리 반에 아무개, 내가 아는 누구누구 같은 식으로 빙빙 둘러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 아이가 말했던 왕따는 사실 본인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내민 도움의 손길 앞에 구원의 다정함 대신 매몰찬 현실을 마주한 아이는 죽음 외에 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경찰서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모두 자살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우울증 환자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 것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심리적 취약함, 우울, 자살 문제는 비단 내가 만나는 주된 집단, 비행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봐도 '이건 자살, 우울을 측정하려는 거구나. 위험한 애들 찾아내려는 거구나'를 들키기 쉬운 뻔한 설문지 몇 장 돌리는 것으로 책임감 혹은 의무감의 총량을 채우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미약하든 강렬하든 자신을 알아달라고, 자신의 어려움을 들어달라고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다. 그 신호가 닿은 사람은 누구든(또래 집단이든 교사이든 부모이든 동네 이웃이든 누구든) 제발 가벼이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내 아이가 '아직은' 죽지 않았을 뿐. 언제고 죽을 수 있음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예민하고 섬세하게 반응할 수 있는 어른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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