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 뭐 하냐?"
친한 회사선배 Y형님이 사내 메시지를 보내왔다.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속뜻임을 알고 있지만,
아내가 회사 동료들과 중요한 저녁 선약이 있는지라 선뜻 응할 수가 없다.
어린이집 하원 후부터 우리 내외의 퇴근 전까지 딸아이를 봐주시는 어머니께
얼른 저녁만 먹고 조금 늦게 갈 것 같다고 눈 딱 감고 얘기드려볼까 순간 고민하다가,
선택의 기로에서 딸아이와 아침에 한 약속이 생각났다.
"아빠 일찍 올게. 저녁에 우리 같이 많이 놀자~"
"히히 좋아요!"
어제 격무로 귀가가 늦었던 터라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다 약속한 내 말에
빙긋 웃어주던 딸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집에 가서 딸내미랑 놀아줘야죠."
진짜로 저녁에 뭐하는지 물은 게 아님을 알면서도 에둘러 대답한다.
이어지는 Y형님의 답장.
"좋네. 딸내미가 놀아주고ㅋㅋ"
초등학생이 된 아들과 딸의 아빠인 Y형님은 이제는 자식들이 학원 다니느라 바빠서 자기랑 안 놀아준다고 투덜댄다.
Y형님의 모습이 머지않은 나의 모습이 되리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요새는 사춘기도 더 일찍 온다던데 우리 딸도 나중에는 방문 닫고 아빠 보러 나오지도 않겠지.
그래도 어쨌든 지금이라도 아빠랑 잘 놀아주는 우리 딸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빠의 귀가가 늦어 같이 못 놀고 잔 다음날은 꼭 등원하기 전 많이 놀고 나가자고 말해주는 우리 딸.
얼마 전 미용실에 처음 가보고 나서는 요샌 미용실 놀이에 푹 빠져있다.
제법 야무지게 아빠 손님의 머리를 손질해 준다. 커트, 파마, 샴푸, 드라이까지.
이 미용실은 손님의 요구사항은 대개 묵살하고, 미용사님이 원하시는 스타일대로만 완성된다는 게 단 한 가지 흠이랄까.
[Image by Clker-Free-Vetor-Images from Pixabay]
"아빠. 내가 씻겨줄게요."
한때는 그렇게 안 씻는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더니, 요새는 또 아빠나 엄마를 씻겨주겠다고 또 난리다.
여름이면 나았을 텐데 하필 한파가 계속된 올 겨울에 욕실에 굳이 같이 씻으러 들어가자고 고집이다.
빤스하나 걸치고 목욕 의자에 앉아 떨면서 딸아이가 씻겨주는 걸 기다린다.
"아빠 손 내밀어보세요, 팔 들어보세요. 눈 감아보세요."
내 검지, 중지, 약지를 합친 정도의 작은 손으로 이곳저곳 유아용 물비누를 문질러 씻겨준다.
머리는 사실 제대로 씻기지도 않아 몰래 내 샴푸를 머리에 묻혀 놓으면,
거품이 언제 이렇게 생겼는지 휘둥그레 바라보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해 결혼 후 여기저기 많은 지인들과 잦은 음주를 즐기며 돌아다니던 시절,
화가 난 아내가 내게 말했었다.
"명심해. 이다음에 늙어서 네 X꼬를 닦아줄 사람은 누가 남을지."
곱게 늙어서 내 한 몸만큼은 잘 건사하다 귀천할 생각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나를 씻겨줄 가족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마음 한 편에 큰 위안이 된다.
'나랑 같이 놀아주고 씻겨줘서 정말 고마워'
[표지그림 출처 : Image by Mohamed Hassan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