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잔소리쟁이

by YOSPAPA

신혼 즈음 아내가 보여준 영상 하나가 문득 생각이 난다.

'신도림역 영숙이'란 영상.


'나 오늘 신도림역에서 영숙이 만났다?'

이성친구 혹은 동성친구가 오랜만에 동창 영숙이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1) 그래서 뭐 했어?
2) 진짜? 헐 대박!
3) 어쩌라고
4) 어쩔티비

[Image by Mohamed_hassan from Pixabay]


대개 리지향적인 사람들은 1번의 형태로 답할 것이고,

공감지향적인 사람들은 2번의 형태로 답한다 한다.

특히 남성들이 여성보다 1번에 가깝게 대답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방식은 대화에 있어서 지속적이고 원만한 소통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는 게 영상의 요지다.


(혹시나 3번이나 4번으로 대답했다면 세대와 성별을 떠나 스스로를 번 돌아보시길 권장한다.)




사회생활을 통해 직간접적 경험들로부터 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화자로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와 별개로,

청자로서는 상대방이 공감을 해주는 소통을 선호한다는 것.

특히 신도림역에서 동창 영숙이를 만난 정도의 단순한 사실전달이 아닌 문제상황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실 대부분 말을 꺼내는 사람들도 이미 마음속 깊이 스스로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은 품고 있.

아주 솔직히 나 또한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정너*'의 인간적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을 가진 신조어)

[Image by geralt from Pixabay]


다른 이가 제시하는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서사를 지지해 주길 원하는 것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본능적 반응은 아닐까.

어차피 최종적인 해결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테고.




사회생활에서만 '신도림역 영숙이' 화법이 중요한 줄 알았는데,

육아를 하면서 역시나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진리의 대화법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특히 상대방이 일방적인 대화를 원하는 벽창호일수록 명심해야 한다.


괴물 꿈을 꾸는 동화책을 본 딸아이가 갑자기 허공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으아, 괴물이다~~~"

"괴물이 어딨어. 괴물이 있어도 우리 딸은 아빠가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아빠!!!(정색). 그냥 나를 따라 해요... 괴물이다~~~"

"아?!(깨달음) 괴물이다~~~"


"휴. 괴물이 아니었잖아."

"휴. 괴물이 아니었어! (으쓱)"


그저 아빠랑 책에서 본 괴물소동을 따라 하고 싶었던 딸아이.

학습이 잘된 아빠가 잘 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씨익 웃어준다.


회사만 그런 줄 알았는데 리 만 48개월의 대표님도 마찬가지.

역시나 사람들은 본인이 듣고 싶은 대답을 좋아한다.




'안돼' '지지' '위험해'


딸아이랑 있을 때 정말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제일 많이 하게 되는 세 가지 언어다.


은연중에 자율성을 억압하거나 수동적인 사람이 되게끔 만들고 싶지 않으면서도,

아빠로서 사전 위험관리를 안 할 수도 없는 아주 양가적인 감정.

침대 모서리에 서서 위태롭게 뛰놀고 있는 딸을 보고 있을 때의 변덕스러운 마음.

어디 한번 넘어져봐야 다신 안 그러지 하고 두 눈을 꾹 감았다가도,

눈을 다시 뜨고서 '위험하다 그만해'라고 말하는 그런 마음이다.


[Image by creisi from Pixabay]


"아빠가 안된다. 만지지 마라. 위험하다. 만 번 말했는데도 하면요?"


얼마 전 딸아이가 거실에서 작은 조립장난감 부속을 음식처럼 입에 넣으려는 장난을 하고 있었다.

삼킬까 겁나 안된다고 했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안되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살짝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아이가 의식할 만큼 잔소리를 많이 하고 있던 건 아닐까?

아이와 소통해 주려 노력했는데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사뭇 진지해져서 아내에게 달려가 물었다.


"여보. 나 잔소리쟁이 아빠야?"

"아니, 여보 잔소리쟁이 아빠 아니야. 그리고 잔소리 안 하는 부모가 어딨어. 하지 말라고 안 할 것도 아니고."


역시 '신도림역 영숙이' 화법을 내게 추천한 우리 아내는 아주 현명하게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준다.

그녀 역시 내가 본인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하지만 말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게 되면서 출근시간이 매우 빡빡해졌다.

조금 일찍 맡길 수 있었던 어린이집과 달리, 등원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유치원.

미리 등원시키더라도 사실상 아이 혼자 놀이를 하며 친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변화에 적응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당분간만 근처에 사시는 어머니께 등원을 도와주실 것을 요청드렸다.


며칠 전, 출근 준비를 하며 딸아이와 놀아주고 계신 어머니와 대화할 일이 있었다.

환절기라 나와 아내, 딸아이 모두 감기에 걸렸었는데 어머니는 괜찮으신지를 여쭈었다.

감기는 괜찮은데 요새 나이가 들어가는지 괜찮던 허리가 많이 아프다고 답하셨다.


"동생이 추천해 드린 홈트레이닝하셨었잖아요. 꾸준히 하셔야 해요."

"운동하는 게 그리 쉽지 않다. 나이 들수록 꾸준히 하기도 힘들어."

"아니면 근처에 잘하는 한의원 끊어드릴 테니, 일시적으로라도 풀리게 한 번 다녀보세요."

"됐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늦겠다. 얼른 출근준비하거라."


어머니가 걱정되어 한 말이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딸아이가 일침을 가한다.


"아빠!!! 할머니한테 잔소리하지 마세요~"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이말년 작가님]




"아빠!!! 나 신발 뒤를 똑바로 신겨줘. 이걸 끝까지 안 신고 걸어가면 넘어져요."

"아이고... 우리 잔소리쟁이."

"나 지금 잔소리하는 거예요???"


응... 너 지금 잔소리하고 있단다...
아빠한테는 할머니한테 잔소리하지 말라더니,

신발 조금 덜 신겨줬다고 신발을 제대로 신지 않고 걷는 위험성에 대해 일장 연설하시는 우리 딸.


그래도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처럼,

서로 많이 사랑하니 잔소리도 하는 거겠지?


아빠가 대학생 때 좋아하던 노래.

아빠와 네가 좋아하는 아이유 언니의 '잔소리' 노래를 불러주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사랑해야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그만하자 그만하자 이런 내 맘을 믿어줘






[표지그림 출처 : Image by JoannaMaitland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