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 놓는다고 누가 관심을 갖겠어. 인기도 없을 텐데 그냥 치우지."
창고에서 소중히 나의 보물상자를 들고 오는 모습을 보고 아내가 얘기했다.
아내 입장에서는 시가 식구들의 방문에 집안정리로 분주한데,
그 와중에 물건을 늘어놓는 내가 이해 안 될 수밖에.
보름 내에 딸아이와 여동생, 큰 조카를 포함해 가족들의 생일이 대거 몰려 있다.
모두의 생일 축하행사 겸 오랜만의 가족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기로 하면서 손님맞이 준비가 필요했다.
집 근처 중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집에 와서 후식과 함께 케이크 파티를 하는 일정.
올해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 다짐한 김에 대청소를 하며 구석구석 잠들어 있는 버릴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혹시나 필요한 가족들이 있을 수 있으니 상태가 괜찮은 물품들은 거실 한 구석에 모아 놓았다.
그리고 혹시나 조카들이 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추억의 보물상자도 창고에서 같이 꺼내 놓았던 것이다.
못마땅한 아내는 한 마디 덧붙인다.
"아이고 그건 도대체 언제 버리시는 겁니까. 우리 미니멀리스트님. "
나의 보물상자에는 일기장과 사진들을 비롯해 각종 옛 전자제품과 장난감, 국내외 동전 등이 담겨 있다.
안 그래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인 데다가 애착을 가졌던 물건들은 더더욱 버리지 못해,
하나 둘 모아둔 것이 한 박스다.
초등학생 시절.
학급활동 일환으로 수십 년 뒤 개봉할 추억의 타임머신을 만들어 편지나 사진을 모아 담아 운동장 한 구석에 묻었었다.
그때의 학급활동이 준 여파였을까.
학창 시절동안 먼 훗날 추억을 회상하기 위한 마음으로 내 방의 책상이나 옷장 한 칸을 소형 타임머신으로 만들었었다.
사실 대학에 들어가고 독립하게 되면서 타임머신을 정리할 기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결국 옛날 물건들을 고가에 소품으로 사기도 한다고 들은 얘기를 핑계로 종이 박스에 잘 모아 본가 창고에 넣어놨었다.
결혼 후 분가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보물들은 전혀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큰 소품박스에 옮겨져 창고 한 구석에 고이 보관 중이다.
[추억의 고물... 아닌 보물상자]
가족들이 집에 모였을 때 열린 알뜰 가족 바자회는 예상외로, 동시에 나의 바람대로 대성리에 마무리되었다.
그중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바로 그 보물상자였다.
'훗. 꺼내놓은 보람이 있군.'
광대가 한껏 올라간 만족스러운 나의 표정을 지켜보던 아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물상자가 개봉되자마자 조카들은 엄청난 관심을 가지며 다가왔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큰 조카는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물려주려 했던 BB탄 권총을 집어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작은 조카는 소형 포켓몬스터 퍼즐과 한쪽면은 장기, 다른 한쪽면은 바둑을 둘 수 있는 양면 자석판을 꺼내 들었다.
놀랍게도 내가 초등학생 때 가장 즐기던 장난감들이었다.
보물상자를 열면 타임머신을 따라 나의 유년시절로 돌아간다.
동네친구들과 방과 후 집에 모여 장기와 오목을 참 많이도 겨뤘었다.
팽이나 구슬 혹은 미니카 부속 등 갖고 싶은 것이 생겨 부모님을 조를 때면,
아버지는 내게 포켓몬스터 퍼즐을 섞어 제한 시간 내에 맞춰오라는 과제를 주셨었다.
[포켓몬스터빵 스티커를 잔뜩 모아둔 책받침은 왜 하필 사라진 걸까...]
BB탄 총은 아파트 지하실 탐험대의 일원으로 동료들과 어둠 속의 적들을 무찌르던 전설의 아이템.
그 당시 동네의 또래 남자아이들은 BB탄 총 하나씩은 있었고, 그 총 하나만 있으면 모두 두려울 게 없었다.
지하실에 이상한 사람이 산다는 누군가 굳이 만들어낸 괴담을 철석같이 믿고 떼를 지어 지하실을 불을 비추고 돌아다녔다.
무서운 그림자 같은 것이 비치면 대원들은 일제히 텅 빈 어둠 속에 BB탄을 발사하고는 했다.
"오빠. 요새는 초등학생들 BB탄 총 못 써. 전에도 한 번 갖고 싶다 해서 안된다 했었어."
격한 관심을 보이는 조카에게 생일 선물로 주려하자, 아이의 엄마이자 나의 여동생이 바로 제지를 한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놀이터나 공터에서 BB탄 총을 들고 노는 아이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요새는 워낙 밖에서 놀지 않아 그런 건가 싶었는데, 여동생 말로는 사건사고가 많아 제한이 심해졌다고 한다.
하긴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옛날이 비정상적이긴 하다.
실명 위험도 높고 가까이서 맞으면 멍들 정도로 아픈 총을 모두가 놀이터에서 전투하며 놀았으니 말이다.
레이저 눈빛을 발사하는 여동생의 강경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내 보물상자에서 상상만 하던 희귀 아이템을 실물로 만져본 조카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갖겠다는 기세다.
"정말 집에서 베개에 쏘는 척만 할게요..."
조카의 모습 위로 갖고 싶은 것을 사달라 조르던 초등학교 4학년의 내 모습이 비친다.
집 밖으로 절대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는 여동생의 조건과,
집안에서 사람들을 향해 빈 총구라도 겨누지 않는다는 나의 추가 조건.
조건들에 대한 이행서약을 몇 번이나 받아낸 후에 내 전설의 아이템은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다음날 휴대전화가 처음 생겼을 때 말고는 개인적인 연락 한번 없던 조카에게서 살가운 카톡 메시지가 왔다.
'삼촌. 집에서 가지고 노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즐거움의 추억까지 같이 상속된 것 같아 내심 더 기뻤다.
[보물상자에서 나온 전설의 아이템]
보물상자 중간중간 발견되는 옛 사진들과 편지글을 보면서 가족들과 같이 추억에 잠긴다.
교복을 입고 사이좋게 나란히 서서 첫째 여동생과 찍은 사진은 다시 보니 성별만 다를 뿐 판박이 얼굴.
"고등학교 때 장난기 많은 내 친구가 오빠 마주치고 '남자 장도연(여동생의 가명)이다'라고 하니까,
오빠가 엄청 정색하면서 뭐라고 했던 거 기억나?
근데 기분 나빠도 내가 나쁠 일인데 도대체 왜 그런 거야?"
"..."
보물상자에 둘러앉아 가족들과 오순도순 옛 추억을 얘기 나누고 있으니 마음이 풍족해지는 기분이다.
마나님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보물상자를 지켜낸 보람된 순간이었다.
가족들이 떠나간 후, 조카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나머지 보물들은 떠나보낼 시간이 왔다.
많이 해져버린 부루마블,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접착 부분이 떨어져 나간 장난감...
물론 그중 절반은 아내가 안 볼 때 슬쩍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다음번 대청소 때는 미니멀리스트로서 꼭 절반을 비우고 말 테다.'
가족모임에서 유일하게 나의 보물상자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딸.
낡아 보이는 상자보다 영롱한 딸기들이 한가득 박힌 케이크를 맛보는데 심취해 있다.
맛있는 걸 먹을 때 더욱더 빛나는 보석 같은 우리 딸의 눈.
사랑스러운 이 순간순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보관할 수 있을까?
아빠는 정말로 보물상자 더 이상 필요 없어. 아빠의 제일 소중한 보물은 너니까.
이제 보물상자 대신 아빠가 글로 된 추억상자 하나 만들어 보기로 했어.
이다음에는 아빠의 글로 채운 상자를 같이 열어보며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표지그림 출처 : Image by SingingAngler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