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만 개 먹을래요

by YOSPAPA

"아빠! 귤 딱 한 개만 더 주세요~"


두 손을 모으고 오른손 검지 손가락만 곧게 편 채,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우리 딸.

이미 간식으로 사과를 잔뜩 먹어놓고서, 귤 하나 더 달라고 말하는 게 스스로도 웃긴가 보다.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걸 익히 알에 내 것, 아내 것, 딸아이 것, 세 개를 씻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예전에는 껍질도 너저분하게 조각조각 뜯어놓기 바빴는데,

이제는 윗부분부터 싹싹 벗겨 꽃모양으로 잘 까놓는다. 가히 귤 먹기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아빠, 엄마. 우리 나눠 먹자!"


반 정도 후루룩 먹고 나면, 으레 나눠먹자는 말을 꺼낸다.

실상은 나눠먹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기한테 더 주리라는 걸 알고 꺼내는 고도의 전략. 불여시.


"아빠. 아~~~ 해봐요."


애교를 부리며, 내 입에 귤 하나를 쏙 넣어주는 우리 딸에게 오늘도 알면서 또 당하고 만다.


"우리 딸도 아기 귤 줄게. 아~ 해보렴."


다른 귤들 사이에 안겨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귤을 우리는 아기 귤이라 부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기귤은 우리 아기의 입으로 향한다.


"이제 그만 줘요. 요새 과일은 당 많다고, 과일 많이 주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귤은 괜찮아. 귤은 감기에 좋아. 많이 먹어도 돼."


아내의 한소리에 친귤당 일원으로서 궤변을 펼쳐본다.




2008년도 겨울. 절친한 부대 후임과 강릉내로 외박을 나왔다.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의기투합한 것은 중앙시장의 한 청과상에서 귤 한 박스를 사기로 한 일.

따뜻한 방 안에서 귤이나 실컷 먹으며 쉬자고 한 말이 씨가 되어 말 그대로 귤을 잔뜩 사버린 것이다.


몇 kg 짜리 박스였는지 가물하나, 건장한 군인 둘이서 꽤나 고전하며 박스를 숙소까지 들고 온 기억은 확실하니 분명 보통 양은 아니었다.

그리고 두 귤대장들 모텔 방에서 1박 2일 동안 그 많은 귤들을 초전박살 냈다는 사실.


딸아이의 귤을 향한 강렬한 집념은 나의 DNA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귤뿐만 아니라 한라봉, 천혜향은 물론 최근에는 유자까지 섭렵하신 우리 딸.

유자청을 선물 받아 저녁에 따뜻하게 한잔 마시려 했더니, 극구 본인도 한잔 달라하신다.

아내가 시원하게 한 컵 내어 드렸더니,

차는 말할 것도 없고 바닥에 깔린 유자까지 숟가락으로 다 긁어드시는 위용을 보여주셨다.


대여섯 살로 기억되는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에 미국으로 이민 가신 작은 이모가 놀러 오셨다.

이모가 좋아하신다고 어머니가 사다 놓으신 낑깡(금귤) 한 봉지를

이모께서 껍질 째 그 자리에서 다 드시는 걸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그 기억에 집안 내력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가 제일 크다고 생각하는 숫자는 만 개.

백 개였다가 어느 순간 천 개였다가 다섯 살이 되니 만 개까지 되었다.


'집에서 만 번 놀고 갈래요.'

'동화책 만 개 읽을래요.'


아, 가장 최근에는 정확히는 만 한 개.빠는 책 만 개 읽을 거라고 했더니,

호승심을 부추겼는지 본인은 만 한 개를 읽을 거라고 한다.


한 달 전쯤 부모님 댁에 가서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과일을 먹다가,

한 개 남은 귤을 누가 먹을 건지 가위바위보 하기로 했다.

딸아이가 가위바위보 규칙을 알게 되며 즐겨하기에 재미 삼아 마련한 자리였다.

장난으로 아버지께서 이긴 사람만 남은 귤을 먹는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받아놓으신 후 시작된 가위바위보.

딸아이가 연속 두 번 가위를 내는 것을 보고,

져주기 위한 의기투합으로 어른들은 모두 보자기로 바꿔낸 세 번째 판.

그리고 딸아이가 홀로 당당히 내민 주먹.


모두의 보자기를 번갈아보더니 엉엉 울기 시작하자, 어머니께서 달래 가며 귤을 까서 쥐어주셨다.

눈물을 질질 흘리며 하나씩 떼어먹으면서 하는 말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귤 만 개 먹고 싶어요. 엉엉엉."


홀로 가위바위보를 진 것이 속상했던 건지, 귤을 못 먹을 뻔한 게 서러웠던 건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그녀의 마음.


귤 하나에 웃고 우는 사랑스러운 우리 딸.

너를 보고 있으면 귤을 만 개 먹은 손 끝처럼,

내 마음도 너를 향한 귤빛으로 물든다.


[나도 귤 먹을래요 -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