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많이 안 좋은지?
둘째를 준비 중인지?
술 마시고 사고를 쳤는지?
2023년부로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고 밝혔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들이다.
내 연령대에서 주요 금주사유는 크게 건강악화, 임신준비, 대형사고 정도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토대로 추론해 볼 수 있었다.
코로나 이후의 영향인지 조직문화의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직장 생활에서도 음주는 필수가 아닌 선택의 영역에 가까워졌다.
회식 등으로 술을 마실 일이 있을 때는 귀가 후 육아의 필요성을 밝히거나,
당일 컨디션을 이유로 술을 못 마신다는 적당한 사유를 제시하면 강권하는 사람들도 딱히 없다.
오히려 금주 후 마주하는 모호한 상황은 예전에 많은 술잔을 기울였던 친분이 두터운 지인들과의 사적인 자리다.
나에게는 모두 해당하지 않지만 앞선 보편적 금주사유 중 한 가지는 꼭 거론된다.
아무것도 해당하지 않는데, 술을 잘 마시던 사람이 왜 극단적으로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며 앉아있는 건지 추궁 아닌 추궁을 받게 된다.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일수록 호기심과 걱정으로 금주의 계기를 구체적으로 묻는다.
연초에는 새해다짐의 일환임을, 최근에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자기 관리를 시도 중이라는 표면적인 취지를 밝히고 있다.
으레 따라오는 후속질문은 '아예 한잔도 안 마시는지'다.
한 잔만이 두 잔, 세 잔이 되고, '한 잔만 더'가 '한 병만 더'가 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직접 경험해 왔기에 아예 한 잔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그나마 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답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질문을 하나 더하곤 한다.
그럼 도대체 언제까지 금주를 할 것이냐고.
연초에는 아주 당당하게 '최소' 올해 한 해는 유지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최대' 올해까지로 바뀌어서,
외적이든 내적이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변화가 생긴다면 언제든 해금하겠다는 음주 재개를 향한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백일동안 쑥과 마늘만 먹고 동굴 속에서 버텨 사람이 되셨다는 대한민국의 강인한 조상 웅녀님.
나도 강인한 의지의 피를 이어받아 어느덧 백일을 넘어 만 4개월을 술 없이 지내보고 있다.
최근 부쩍 피부나 안색이 좋아졌다는 주변의 이야기들을 듣거나, 가족들과 보내는 밀도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느껴지는 때면 스스로도 사람다운 삶으로 돌아가는 것 싶기도 하다.
동시에 술을 마시지 않으니 삶의 활기가 살짝 감소된 것도 느껴진다.
정확히 표현하면 활기의 진폭이 작아진 느낌이다.
주사(酒邪)로만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술은 분명 기분이 고양된 고점으로 쉽게 도달하게 해주지 않던가.
[Image by Myriams-Fotos from Pixabay]
물론 고강도 운동 후의 쾌감(Runner's High)이나 다른 성취감으로 대체될 수 있겠으나,
대부분 그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술에 의존해서만 단기적인 해결을 반복하는 건 몸과 시간을 축내는 일이 맞지만,
가끔씩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 그 기분을 증폭시켜 주는 술도 필요함을 잠시 예찬해 본다.
기분 나쁘게 마시는 술은 독극물이고, 기분 좋게 마시는 술은 극약이라는 말처럼.
거창함을 걷어내고 솔직하게는 가끔씩 그저 술이 마시고 싶다.
난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항상 말하고 다녔었는데,
둘 다 좋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해야겠다.
문득문득 분위기나 음식과 잘 어울리는 술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맛있는 음식, 특히 해산물이나 국물요리를 먹을 때 생각나는 소주나 화이트 와인.
중식을 먹을 때는 고량주.
자연을 바라보며 마시는 막걸리.
갈증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날려주는 맥주.
사실 지금도 가끔씩 참다 참다 술이 생각날 때면
냉장고 한 구석에 쟁여둔 0.00% 무알콜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시며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나의 마법물약(potion), hite ZERO]
그런 내가 왜 금주라는 스스로 만든 고행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주변에도 말로는 미처 다 밝히고 있지 못한 나의 2023년 금주 이야기를 글의 대나무숲에 잠시 풀어보려 한다.
술을 줄여야 한다는 건 작년 연말부터 마음속에서 계속 가지고 있던 생각이긴 했다.
작년 겨울의 어느 날, 과음을 한 후 아침에 숙취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딸아이가 옆에서 계속 떼를 쓰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떼 좀 그만 쓰라고 반응하고 말았다.
딸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울면서 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빠는 눈 빨간 날은 맨날 나한테 화를 내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마음도 예민해지기 십상.
그 상태에서 날이 서있는 내 반응들이 아이에게도 독이 되어 전달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 딸아이에게 자상한 아빠라고 자만해봤자 아이에게는 빨간 눈의 아빠가 화내는 모습이 더 크게 각인되고 있을 텐데, 내가 변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 송년회 자리에서 한 친구가 최근에 보았다는 '유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 이야기를 꺼냈다.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님이 출현하신 편이었는데 엄청 재미있게 봤다는 후기였다.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었길래 그렇게까지 얘기를 했나 싶어 다음날 출근길에 버스에 앉아 휴대전화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로 나는 바로 손웅정 님의 광팬이 되었다.
[tvN, '유퀴즈 온 더 블록' 제172화 중]선수 손흥민이 아닌 아들 손흥민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애정.
진중한 삶에 대한 시선과 철학에 완전히 사로잡혔던 것이다.
주말에 바로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는 그분의 저서까지 바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 책이 작지만 큰 변화의 시작이었다.
[2022.12.24. 날짜를 다시 보니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대한 후회와 안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와 의지가 강렬해졌다.
손흥민 선수에게 멋진 롤모델이었던 손웅정 님처럼,
최소한 나도 딸아이의 바람직한 성장을 돕고 존경받을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가정은 최초의 학교고 최고의 학교다.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말에 앞서서
부모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먼저 보고 배운다.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손웅정 지음)'中 -
내가 손웅정 님처럼 딸아이에게 특정 분야의 선수로서 성장을 지도해 줄 재능이나 경험은 당연히 없다.
그럼 앞으로 딸아이와 꾸준하게 함께 교감을 쌓고 같이 성장해갈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동화책 읽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우리 딸.
같이 좋은 책과 글들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일들은 앞으로도 함께 오래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순간에도 조금 더 자란 딸아이와 아내와 같이 식탁에 모여 독서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중이다.
그리고 아빠도 말뿐만이 아니라 열심히 글을 써왔다는 행동의 기록을 남겨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나둘 글을 남기는 것을 시작했다.
새해 다짐으로 글을 쓰기로 한 것에 앞서 이참에 생각해 왔던 대로 술도 한 번 끊어보기로 했다.
회사생활에 육아까지 병행하면서 글까지 써보겠다는 욕심이라면,
시간 확보를 위해 무언가 하나는 내 삶에서 과감히 덜어내는 게 필요했다.
실제로 술을 마시지 않기 시작한 후로 내게 꽤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멀쩡한 정신에서의 취침 전 저녁시간과, 아주 가끔씩은 눈이 저절로 떠진 새벽의 시간들.
그토록 지루하고 피곤했던 출퇴근 시간도 여러 가지 구상을 해보고 초고들을 정리하기 제일 유용한 시간이었다.
때로는 점심시간에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음을 글을 써보기 시작하면서 매 순간마다 절감한다.
더 나은 단어, 문장, 구성을 위한 계속되는 고민과 퇴고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가정이나 회사에서 다른 중요한 일들이나 고민들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는, 글쓰기도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자주 막힌다.
온라인의 AI 에디터와 오프라인의 마나님 에디터께서 집필을 세심히 독려해 주시지만, 결국은 나 스스로의 의지와 내적동기가 제일 중요한 것임도 절실히 깨닫는다.
[고마워요, 브런치스토리. 힘들지만 다시 근육을 키워볼게요!]
최근에 글쓰기가 계속 막히고 지연되면서 술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술을 마시고 고양된 상태에서 글을 쓰면 혹시나 글이 더 술술 잘 써질라나?'
적당히 마시면 그럴 수도 있겠고, 높은 확률로 적당하지 못하면 안 마시느니 보다 못할 수도 있겠다.
초심을 잃지 않고 올해의 금주와 글쓰기에 대한 의지를 이어가 보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특히나 사랑하는 딸의 이야기를 남기는 첫 글모음을 완성할 때까지는, 정화수를 떠놓고 기록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다독여야겠다.
올해의 언젠가 내가 목표한 첫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때는 한 번쯤 기쁨의 축배를 들고 싶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남기고 싶은 말.
아빠는 늘 아빠와 네가 멋지게 더 자란 후에,
술 한잔 함께할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단다.
그날이 오면 아빠와 꼭 기쁘게 술 한잔 같이 해주렴.
그럼 우리 모두의 멋진 앞 날을 위하여!
[표지그림 출처 : Image by tianya1223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