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작업실
그의 재능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들
음악 하는 사람과 살림을 차렸었다. 다작하는 사람이었는데 가진 재능만큼 문제도 많은 사람이었다. 취해서 빗속을 뛰다가 넘어져 팔을 두 동강 낸 적도 있고, 녹음실 사장에게 자기가 만든 버전이 낫다며 싸우다 해고당한 적도 있으며, 마스터링 하는 친구가 작업을 도와주지 않자 그 친구 얼굴에 돈을 뿌린 적도 있다. 편의를 위해 그의 이름을 H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이렇게 망나니처럼 굴어도 H가 계속 같은 바닥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그 가격에 그 정도의 완성도를 보장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무책임하고 유혹에 약하고 술에 의존하는 모난 성격이, 그의 아이같이 지나칠 정도의 창의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H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 종종 처하게 되었는데, 그게 끔찍이도 싫어서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다가도,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 중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완전히 상반된 것을 동시에 원하고 있었다. 이건 우유부단한 것과는 다르다. 이럴지 저럴지 망설이기만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강렬하게 반대되는 극단을 원해서 나 자신은 연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 모순과 혼란,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 세계를 경험했다.
미국에서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개념미술이란 걸 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아무런 기술 없이 아이디어만 내는 한량 같은 사람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내 작품은 현학적인 설명과 내 출신학교 이름에 기댈 필요가 있었다. 반면, H는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지만 풍부한 실무경험 덕분에 한 곡이 완성되기까지 필요한 모든 과정을 혼자 다 해결할 수 있는 프로듀서이자 엔지니어였다. 즉흥적으로 아무 때나 몇 곡이든 작곡할 수 있는 넘쳐흐르는 에너지가 있었다. H와 함께 있을 때면 저런 사람이 진짜 예술가이고 나는 사기꾼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H와 함께 살 때 가장 좋았던 건, 그가 아파트 한편에 휘뚜루마뚜루 차린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만드는 그를 뒤에 앉아 지켜보는 일이었다. 내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연마하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꽤 묘한 일이다. 처음에는 그냥 소리에서 출발해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 왠지 나도 그 창작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사실 4초쯤 되는 구간을 몇 백번이고 반복해서 다듬는 걸 실시간으로 듣고 있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 시간은 뒤로 갔다 앞으로 갔다 하기도 하고,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상하게 변형된 시간은 나도 그가 속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혹은, 그 세계를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시간 역시 가치 있게 느껴졌다. 그가 음악을 만드는 걸 보고 있으면 모든 게, 우리 미래도,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앉아서 음악을 만드는 H의 뒤통수가 있는 풍경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 덕에 깨달은 게 있는데, 하나의 창작물은 그게 만들어지는 과정 동안에만 살아있다는 것이다. 완성이 된 이후에는 원작자라고 불리는 사람의 커리어나 포장을 기다리는 상품이 있을 뿐인데 이런 건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마저 다 마무리가 되면 그 곡은 듣는 사람의 머리와 몸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고, 더 이상 만든 사람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게 되어 버린다. 경험하는 사람의 노래가 되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음악도 계속 떠나가고 나도 떠나서 H는 슬플 것 같지만 화수분 같은 그의 영혼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그의 어린아이 같이 거리낌 없는 성격 덕분에 우리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새로 참여하게 된 음악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 준다. 여전히 너무도 솔직하게 별별 얘기를 다 해서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친구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그는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여전히 내가 사기꾼일지 의심하지만 그럼에도 창작을 계속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직 글을 쓰는 게 내 직업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쓰고 있는 동안은 행복하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