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A Jul 24. 2023

섹슈얼과 에로틱

그리고 난자냉동

 비록 결과적으로 완전히 실패했지만, 작년 초 이제 전남편이 된 사람과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었다. 처음으로 상상해 본 임신한 내 모습은 낯설었다. 타지에서 코로나를 겪으며 전에는 관심도 없던 개념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생존, 혈육, 내가 없어져도 이 세상에 남겨질 나의 유전자 같은 것들. 


 8년 동안 연인이었던 사람과의 새로울 것 없는 섹스에 분명하고 중요한 목적이 생겼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관계가 끝나고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대로 정자가 난자 방향으로 잘 헤엄쳐 갈 수 있도록 다리를 올리고 누워있었고, 나의 파트너는 내 허리 밑에 베개를 받쳐줬다. TV에는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고 물도 떠오는 그를 보면서, 이 상황이 실제 성관계보다 더 ‘에로틱’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작가 로런 그로프가 단편집 <플로리다>의 <꽃 사냥꾼>에서 썼던 표현이다, 그로프는 ‘섹슈얼’ 한 것과 ‘에로틱’ 한 것을 구분하면서, “에로틱은 그녀의 갓난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다. 그 동물냄새와 만져지는 느낌과 따뜻함과 부드러움. 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피부에서 나는 비누 냄새를 맡는 것이다. 암 걱정이나 빙원이 녹는 것에 대한 걱정 없이 햇살이 얼굴 위로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번역이 잘못된 건가 싶었는데, 어렸을 때 아파서 학교를 가지 않고 누워있는 내 뜨거운 이마에 느껴지는 엄마의 시원한 손의 느낌 같은 걸 말한다는 걸 후에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가 본능적인 힘에 이끌려 나를 돌볼 때 내가 느끼는 물컹한 기분. 혹은 살아있는 것과 연결되어 나에게도 그 생명의 기운이 느껴질 때의 감각. 


 열 살쯤 되었을 때, 아빠와 탄 관람차가 갑자기 오작동하다가 멈춘 적이 있었다. 우리가 탔던 칸이 뒤집히며 아빠의 주머니에 있던 지갑, 동전, 자동차 키가 머리 위에서 날아다녔다. 아빠는 한 손으로는 (바닥이 되어버린) 천장을 지지하고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안아서 당신의 몸통으로 잡아끌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만큼 아빠도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아빠의 본능은 나를 보호하는 거였다. 그 손길이 아직도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비이성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내가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생명체를 상상하면서 임신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잠시나마, 3-4일 정도, 임신한 줄 알고 태몽까지 꿨다. 태양이 내 몸 안에 있는 것처럼 기뻤다. 둥근 빛이 내 안에서부터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달 뒤, 나는 이혼을 하고 난자 9개를 냉동했다. 돈과 현대과학으로 내 삶의 유통기한을 늘린 것이다.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강한 열망도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흑백 초음파 사진 속에 보이는 나의 난자가 들어 있다는 난포, 그 찌그러진 원들을 보면서 궁금해진다. 이 중 하나가 언젠가 꼬물거리는 태아로 변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