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주기장에 세워지고 다음 비행을 위해 지상에서 준비하는 시간을 그라운드 타임(ground time)이라 합니다. 지상에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갈 연료를 보급하고 화물칸에 짐을 싣고, 기내식과 음료 카트 등 기내에 필요한 물품을 싣습니다. 동시에 클리닝 직원들 여럿이 들어와 구역별로 화장실과 좌석을 청소합니다. 그동안 정비사와 기장은 비행기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고, 승무원들은 비상상황에 써야 하는 장비들을 우선적으로 체크한 뒤 서비스 물품들을 정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비행 중이 아닌 그라운드 즉,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주기장에 세워진 비행기. 밖에서는 평온해 보일지언정 기내 안은 아주 난리도 아닙니다. 케이터링(물품 싣는) 직원들과 클리닝(청소) 직원들로 복작거리고, 때론 쿠션이 날아다니며, 청소기를 피해 다니고 쓰레기 더미를 넘어 다니며 승무원들은 물론 모두 각자의 업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특히 그라운드 타임이 짧은 국내선이나 단거리 구간에서는 직원들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준비 시간이 없기에 다들 예민해진 탓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라운드 타임을 길게 가졌습니다. 교통사고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슬기로운 입원 생활> 연재를 마무리하고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거든요. 습작으로 끄적이는 동시나 그림책을 올려볼까, 인*그램에 올리는 것처럼 사진과 짧은 글을 올려볼까, 생각만 하다 한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사실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을 쪼개 글을 끄적이는 게 생각처럼 쉬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청소와 빨래, 갖은 집안일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돌아왔고, 또 어떤 날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소파에 늘어져 있고 싶었거든요. 바지런을 떨어도 모자란 시간인데 그렇지 못한 성격 탓에 여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네. 맞아요. 핑계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갖은 핑계를 대며 '글쓰기'를 저쪽 어딘가에 던져두었습니다. 글을 안 쓴다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고, 제가 그렇게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기에 마냥 덮어두었지요.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고, 조금의 틈이 보이면 저는 또 이곳을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미련이라 할까요?
스스로 만들어낸 숙제를 꺼내 다시 열었습니다. 매일 쓰기 루틴은 자신이 없고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굴레를 만들어 제 자신을 다시 몰아넣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평생 '글쓰기' 주변만 기웃거리다가 죽는 순간에 후회할 것 같거든요. 너무 장황한가요?
내 안에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데 표현력이나 문학성 같은 건 모르겠고, 그저 어디에든 적어두고 누군가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딱 그 정도입니다. 제가 뭘 대단할 걸 하겠다는 게 아니고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또 긴 인생. 한강 작가님처럼 대단 한 업적은 아니더라도, 죽어서 이름 석자는 못 남겨도, 끄적댄 기록 정도는 몇 개 남길 수 있는 거잖아요. 그 옛날부터, 역사가 아주 깊은 구전 문학처럼 '작자 미상'같은 존재는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잖아요. 하하 ^^; 그렇게 마음을 가벼이 하고 제 스스로를 정비했습니다. 무엇을 쓸지, 어떤 이야기를 할지,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정리한 결과가 바로 <비행을 일삼던 여자>입니다.
소개글에 적어둔 것처럼 19년에 가까운 비행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담을 슬쩍 풀어볼게요. 앞으로 매주 수요일에 만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