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

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by Rachel

4. 출석부 사진, 그날의 기억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아침이었다. 그 날, 교실 문을 여는 첫 사람이 나였다.

우리 학교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교실 문을 여는 아이가 출석부를 교탁에 올리고, 닫는 아이가 교무실에 가져다놓는 것.

나는 여느 날처럼 출석부를 가지러 갔고, 교탁에 올려두었다.

앞문과 뒷문을 활짝 열고, 1분단 창문부터 4분단 쪽 복도창까지 하나하나 열었다.
마지막 바깥 창문까지 모두 여니, 교실은 맑은 공기로 금세 채워졌다.

습관처럼 수업 준비까지 마쳤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남은 시간,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출석부를 펼쳐보기로 했다.


사복을 입은 반 친구들의 얼굴이 궁금했다. 교복이 아닌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니까, 더 개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장 한 장 짚으며 친구들의 얼굴을 구경하던 중, 3번에 있는 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 티셔츠에 은색 별 모양 목걸이를 하고 찍었던,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다.


그다음 장에서 그 애의 사진을 보았다. 하얀 셔츠에, 유독 눈에 띄는 붉은 입술.

묘하게 인상 깊었다.

'오, 성숙하다. 그리고 인상이 또렷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뭐 보고 있어?”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 애였다.

출석부를 덮지도 못한 채 얼어 있었던 나에게,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으로 와 함께 출석부를 내려다봤다.

“내 사진도 봤어?”

“응. 멋지던데.”

“좀 못생기게 나온 것 같지 않아?”

귀가 빨개진 그 애의 얼굴을 보며, 나는 웃으며 장난쳤다.

“아니, 잘생겼던데. 입술만.”

우리는 키득거리며 출석부를 덮었다. 그러자 그 애는 다시 출석부를 펼쳐 내 사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너도 예쁘네. 목걸이만.”

“뭐야, 그게.”

그때 다른 친구가 들어왔고, 우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함께 사진을 보고 키득거리고 그날 이후.

점심시간, 교실에서 장난기 많은 남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출석부 사진을 보며 품평회를 열었다.

신체검사날 이슈가 있었던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그 일을 두고 말이 나왔었다.

왜들 저러냐고, 누가 얘기해서 저러냐고.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 말의 끝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남학생들이 사진을 보며 숙덕거리자, 기분이 나빠진 여학생들 몇 명은 자기 사진을 가져가거나 숨겼다.

그래서 사진 몇 장이 사라진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같이 사진을 본 그다음 주. 그날도 일찍 온 날이었다.

출석부 이슈가 있었던 주라서, 얼마나 사진이 없어졌을까 하고 펼쳐 봤다.



내 사진보다는 그 애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있었다. 다른 남자애들 사진도.

그다음,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 다른 애들것은 있는데..

몇몇 빈자리가 눈에 띄어 이름을 죽 읊어 내려가다가 아무 생각 없이 내 이름을 봤다.

없었다.

왜 없지?

내 사진.

그거 딱 두 장 남은 건데.

제일 잘 나왔던 사진인데 많이 뽑지 못한 사진이었다.

그래서 내년에도 제출하고 싶었던 사진인데.


당황해 사진 포켓을 매만지던 나는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없어진 사진들 중 몇 장은 겹쳐져 있었다.
하나씩 빼보니, 어떤 사진은 본래 이름의 사진 위에 다른 친구의 사진이 덧대어져 있었다.

알고 보니, 반에서 공인 커플로 알려진 아이들의 사진이었다.

'아, 얘네는 자기들 커플인 게 오래되고 싶어선가?'


그런 소문이 돌고 있긴 했다. 일명 '출석부 사진 주술.'
누구 사진을 누구 사진 뒤에 넣으면 그 사람이랑 사귈 수 있다느니, 오래간다느니 하는 말들.

웃기지만, 왠지 그럴듯하게 여겨졌던 말들.


그렇지만… 나는 우리 반에 좋아한다거나, 잘되고 싶은 사람이 없었어서,
그런 주술을 할 사람도 없었다.

날 좋아하는 사람도, 날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누가 그랬을까. 왜 내 사진만 없어진 걸까.

혹시, 내가 미워서? 보기 싫어서 사진째로 빼버린 걸까?

그 순간부터 나는 교실 안의 시선이 어딘가 나를 향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사진 그게 뭐라고.

갑자기 와닿은 미움이라는 감정에 눈물이 번뜩 났다.

속이 상하고, 쓰렸다.

속상해서 약간은 거칠게, 출석부를 덮었다. 그리곤 내 자리로 가서 엎드렸다.

오늘따라 혼자인 교실이.. 무서웠다.

엎드려 있으니, 누군가 말을 걸었다. 그 애였다.
"왜 그래? 너, 눈물까지 나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 대화 중에도 출석부가 눈에 닿으니 소금처럼 따가웠다.
눈물을 훔치곤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짜, 아무 일도 아니야."




사진이 없어진 것을 알고 난 뒤, 한달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사진 이슈도 시들해져서 아무도 들여다볼 생각 않는 출석부를,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웃는 걸 봤다.
'사진 주술, 저 애가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점심시간에 출석부를 혼자 확인했다.
아니었다. 그 애는 제 사진을 돌려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무심코 사진들을 쭉 둘러보는데, 포켓을 세로로 봐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평면으로 보면 안 보이지만, 책처럼 세로로 보면 겹친 사진이 보일 것 같아서.
그래서 그때 봤는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었다.

아무도 장난을 걸지 않던 그 애의 사진.

그 뒤에, 숨겨진 사진 한 장이 숨어 있었다.
대체 누가 간 크게 그 애에게 장난을 쳤나, 하고 꺼내 보니, 내 사진이었다.

없어진 내 사진이, 왜 거기에 있지? 제출하고는 단 한 번도 나는 손댄 적 없는 사진이 왜?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거 같아서 어.. 하고 멍해 있었다.
'누가, 대체 왜?'

타이밍 좋게도, 그걸 확인한 순간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애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교탁에 서 있던 난 그 애랑 눈이 마주쳤다. 그 애의 시선이, 교탁 위 출석부를 향했다.

그리고 다시 눈이 마주치자, 그 애는 고개를 돌렸다.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바로 물어봐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봤어?"
"뭘?"
"내 사진, 없어졌다고 했었잖아. 그날 나 되게 속상해한 거 기억나?"
"응. 그런데?"
태연하게 말하는 걸 보고 '그 애가 한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없어졌던 내 사진.. 네 사진 뒤에 있었어. 누가 그랬는지 혹시 알아?"
"아니, 모르겠어."

모르겠다.. 그 말을 듣고 당황스러웠다.
모르겠다니. 반에 그 애 좋아하는 애가 얼마나 많았는데. 걔들 중 하나의 소행일 수도 있는데.

태연한 걸 보면서 쟤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아, 그때 눈에 들어왔다. 그 애가 땀 흘리는 게.

5월이 되어 날이 더워지긴 했는데. 살짝 더워진 거 치고 꽤 땀을 많이 흘리던 것이 수상했다.

뭔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갈팡질팡해서 따지기도 뭐 하고 그래서 그냥 그만둬버렸다.
그 애가 그렇게 흘리던 땀방울 하나만으로도, 사진 사건의 답을 알아낸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출석부를 펼치지 않았다.

사라진 건 사진 한 장이었지만, 그 뒤에 숨은 마음은 나를 오래도록 흔들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 때 사라진 건 정말 사진 한 장이었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들의 얼굴보다도, 그들이 숨기고 있는 마음을 더 먼저 보게 되었다.

출석부는 덮었지만, 그날의 감정은 오래도록 마음 한 켠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내가 누군가에게서 정말 보고 싶었던 마음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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