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Y.
그녀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혼자 등교했다. 그리고 교실에서 너를 마주쳤다.
“안녕. 누가 이렇게 일찍 오나 했더니, 너구나.”
“나보다 일찍 오는 사람이 드문데. 너 되게 일찍 왔네. 버스 타고 왔어?”
그렇게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나는 책상 위에 가방을 두고 제일 먼저 창문을 열었다.
엄마가 환기의 중요성을 자주 이야기했고,
나는 어릴 적부터 기관지염을 자주 앓았다. 그래서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침 일찍 창문을 여는 건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문을 여는 동안, 그 애는 자기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날 공부할 교과서들을 하나씩 펴보며 점검하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다 열고 나서 조금 더 숨을 돌리고 싶어, 복도 끝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자, 마음속 어딘가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혼자인 것도 나쁘지 않네. 자유롭다.’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 애가 복도로 나왔다.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왜 나왔어?”
“네가 없어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바람 맞이. 나는... 아침에 환기시키면서 맞는 바람이 좋아.
그 바람 냄새도. 풀 냄새 실려오는 느낌이 좋아서.”
그 애가 잠시 시간을 두더니 말했다.
“너는 이런 공기를 좋아하는구나.”
“응, 좋아해. 마음이 탁 풀리는 거 같아서. 바다 보는 것처럼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
“바다 보는 느낌이라. 너 되게 시적이다?”
“시적이라니. 시 쓰는 거 되게 못하는데?”
“그냥, 그렇다고. 아무튼. 그럼 그동안 교실 환기는 네가 한 거야? 선생님이 칭찬하기 전에도 계속?”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어릴 적에 기관지염을 잘 앓았거든. 그래서 환기가 중요하다고 엄마에게 배웠어.
그런데 여기 교실은 나만 쓰는 것도 아니고, 다른 애들도 쓰잖아. 다들 맑은 공기 마시면 좋잖아.”
나도 모르게 그 애에게 미소지으며 말한 모양이다.
눈이 마주친 그 애는 잠시 말이 없었고, 나는 다시 논을 바라보았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모가 초록빛으로 빛났다. 꼭 그 모가 우리들 같았다.
반짝반짝한 모를 보니 언제 클까 싶어서 매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그 애는 내가 창문을 여는 걸 도와주었다.
그 봄날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맑고 부드러웠다.
그때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공기와 분위기로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말이 없어도, 그 애가 있다는 사실이 내 아침 시작을 환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은, 환기를 할 때면 그날의 아침 풍경이 떠오른다.
복도 끝에서 맞던 바람, 그 애의 낮은 목소리, 햇살에 반짝이던 논의 초록빛 모들.
모든 것이 조용했지만, 그래서 더 또렷하게 남았다.
그 애와 나눈 말보다,
그 애와 함께 바람을 맞던 그 시간이 더 깊게 내 안에 남아 있다.
누군가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는 건, 반복되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에도
기억과 사랑이 함께 깃드는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혼자였던 아침이, 누군가와 함께 서 있었던 기억으로 바뀌던 그 놀라운 순간.
그건 내게, 아주 조금씩 스며드는 가랑비 같은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