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

말과 눈빛 사이

by Rachel

4.5. 우리만 아는 비밀


그 즈음 나는, 종종 수학 문제를 들고 그 애에게 다가갔다.

중간고사가 끝난 뒤, 수학이 내가 가장 부족한 과목이라는 게 드러났다.

수학은 늘 내 평균을 깎아먹는 과목이었다. 애매한 문제가 생기면, 결국 그 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수학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몰릴 때는 피했다.

점심시간이나 3교시 즈음, 교실이 조용해질 무렵이 내겐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 애는 항상 자기 자리에 붙어 있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교실에서, 나의 질문은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수학 문제를 들고 다가갔고, 그 애는 평소처럼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문제를 들여다보다 말고, 나는 문득 그 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지루한 표정이 유독 돋보였다.


"저기."

"설명 안 듣는 거야?"

"아니, 그냥… 되게 지루해 보여서. 너 혹시 설명해 주는 거 지겹거나 힘든 거야?"

"아니야. 내 공부도 되고, 좋은데."

그 애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모르게 장난처럼 말했다.

"근데 오늘은… 왠지 되게 장난치고 싶은거 같아."

"왜?"

"다른 애들이랑도 장난 많이 치잖아. 가끔 못된 장난 치고 싶고, 그러진 않아?"
"당연히 하고 싶지. 나도 그런 장난 좋아해."
"그런데 왜 안 해?"

그 애는 한 박자 쉬고, 가볍게 물었다.

"…일탈하고 싶냐고 묻는 거지, 지금?"

"응. 미안해, 설명해 주는데 딴 얘기해서. 이건 내가 혼자 풀어볼게."

내가 문제집을 덮으려 하자, 그 애가 말했다.

"아냐. 그런 질문, 나도 좋아. 나도, 일탈 같은 거 하고 싶어. 근데— 그러면 안 되니까."

"왜? 너도 사람인데, 그런 거 한 번쯤은 해봐도 되잖아."

그때 그 애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나도 놀라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괜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았고,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본 그 애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런 질문, 더 해줘도 돼. 기다릴게."

그 말이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뭔가, 가져서는 안 될 비밀을 둘이서 공유하게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말하지 못한 또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

학년 말이 되자, 아이들은 누가 공부를 잘하고 누가 어떤 학원을 다니는지를 대충 알고 있었다.

그 애는 학원 이야기가 나오면 늘 곤란해했다.

"야, 너 무슨 학원 다녀?"

그런 질문이 나오면, 그 애는 웃으며 말했다.

"학원 다니는 거 알아서 뭐 하게. 그냥… 학원 안 다닌다고 생각해."

그런 말을 옆에서 듣고 있다 보면 정말 안 다니는 걸까, 아니면… 비밀로 하고 싶은 걸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원 버스를 탔다. 그날따라 버스 안에는 나 혼자였다. 3분쯤 지나, 버스는 출발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MP3를 귀에 꽂았다. 멜로디가 막 흘러나오려는 그 순간이었다.

문득,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버스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다. 그날따라 정말로 나 혼자였으니까.

그럼, 이 시선은 뭐지?

살짝 오싹했다. 나는 귀신 이야기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아이였으니까.

고개를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그제야 알았다. 신호 대기 중이던, 같은 학원이지만 다른 목적지의 버스 안— 그 안에, 그 애가 있었다. 나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그 애.



우리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3초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했다.

좌회전 신호를 받는 그 틈, 내가 탄 버스가 멈춘 사이로, 그 애가 탄 버스가 지나갔다.

그 애는, 창밖을 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 애도 우리 학원을 다니고 있었구나.

그 애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눈빛으로 대신 건네고 있었다.

‘너 왜 거기 타 있어?’

‘넌 왜 거기 있어?’

‘…말할 거야?’

그 질문들을 남긴 채, 그 애의 버스는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며,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엄청난 비밀이었다.



왠지, 그 비밀은 나만 알고 싶었다.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애는 우리 반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같은 학원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걸, 심지어, 그 애에게조차도.

그건 우리 둘만 아는 비밀 같았다.



질문처럼, 그날의 눈맞춤도—

우리 사이의 쌓여가는 마음의 결이었다.

그 애는 나에게, 말보다 눈빛이 먼저 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눈빛을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우리는 말보다 눈빛이 먼저 닿는 사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애의 침묵조차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며 가슴에 남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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