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 속에 숨은 칼(?)
Ring! Ring!
"May I speak to Moses?"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올 것이 왔어. 따지고 보면 개인 피해자들보다 더 큰 금전적 손해를 본 아파트를 소유한 회사. 이게 워낙 큰 사건이다 보니(엄청 큰 사건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됨), Manager 건너뛰고 Director한테 전화가 왔어. 상식적으로 이 정도로 큰 손해를 끼친 사건의 가해자에겐 가차 없어야 하잖아. 난 아파트를 떠나라고 하면, 그럴 생각도 했었고, 소송을 걸겠다 해도 사실 할 말이 없었어. 그런데 통화하는 Director의 목소리가 정말 VIP 대하듯 나긋나긋하고 친절해.
속으로 2가지를 생각했어
‘나에게 거대한 금액의 소송을 하기 전에, 그러니까 이 미국 땅에서 날 밑바닥 끝으로 끌어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친절인가?‘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호의 같은..
’ 아니면 뭔가 저쪽도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정말 친절한(내 마음속엔 살벌한) Director와 당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어. 4시간 정도 남았었는데, 거실에 가만히 앉아서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과 분침만 흘러가는 걸 바라봤어.
'여기서 내 미국 생활은 끝나는 건가..'
물 한잔 먹을 수도 없었고 (난 평상시 절대 굶지 않아 ㅠㅠ)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서 벽에 걸린 시계만 계속 바라봤어.
그렇게 영혼이 없는 동상처럼 앉아 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룸메이트는 거실로 나와서 따뜻한 커피 한잔 타주며 힘내라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알려줘. 그러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라고 하더라고.
정말 위로가 일도 안 됐지만, 그래도 고마운 마음에
"고마워"
라고 얘기했는데 나중에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마워하게 돼.
나갈 시간이 되어서, 노트와 펜, 그리고 그때 당시에 나의 유일한 영어의 동반자, 전자사전을 가지고 사무실로 향했어. 당시에는 미국에서는 스마트폰이 마켓에 나오기 전이었고, 한국에서는 막 나오기 시작할 때라 지금처럼 검색도 쉽지 않았어. (S사의 갤럭시 첫 모델이 나왔을 때)
소가 최후를 맞이하러 도살장에 끌려가듯 발걸음이 죽기 직전처럼 무거웠어. 사무실 앞에서 한숨을 크게 한번 푹 쉬고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중년의 한 백인 여성이 웃으면서 악수까지 하면서 날 반겨줘. 아까 통화했던 디렉터였어. 내가 사무실에 오기까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어.
굉장히 밝은 스마일과 함께 나를 한 룸으로 안내해. 앉자마자 본인 이름과 함께 다시 본인 소개를 하고 내가 가해자인지 이름을 물어보고(내 혼자만의 생각이었어), 아까 통화하면서 요청했던 여권과 여권에 붙어 있던 비자를 보여달라고 하더라고.
‘이거 여권도 뺏기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여권과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던 아파트 계약서와 대조하더라고. 그런데 확인하면서 어느 구간에서 웃음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날보더니 다시 활짝 웃어. 그리고는 다시 돌려줬어.
‘아 빼앗기는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라고 혼자 중얼거렸는데 웃고 있던 웃음은 사라지고 드디어 무거운 말투로 얘기를 시작해.
”알고 있겠지만, 이 사고가 꽤 큰 사고예요. 이 사고가 이때까지 여기 빌리지(많은 아파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있었던 사고 중에 Top 3중에 하나지 않을까 싶어요. 아마 예전에 건물 한채 화재로 손실된 거 이후로 2번째이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직원들이 우리 쪽 건축 회사들 사람들과 얘기 중인데 건물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이 말을 듣는데 진짜 절망적이었어. 그런데 뜻밖에 이런 말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