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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데이 Mar 06. 2023

3화. 할아버지께서 꺼내신 지도

그러나 지도에 없는 할아버지의 마을


2018. 8


손녀가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해 묻자 할아버지는 잠시 기다려보라며 소파에서 일어나셨다. 이내 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오셨는데, 무언가 이것저것 껴있는 파일더미였다. 펼쳐보니 지도도 나오고, 책도 나오고, 글씨로 빼곡 차 있는 문서들도 나왔다. 뭐가 이리도 많은 것인지. 그 파일에서 무언가 계속 나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할아버지가 괜히 고향을 다시 지어달라고 부탁하신 게 아니겠거니 했다.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 송암리. 거기가 내가 자란 데야.

할아버지는 지도를 하나 건네시면서 고향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건네받은 지도의 좌측 상단에는 맹산군이라 적혀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지덕면이나 송암리라 적힌 지명을 찾아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의 뚜렷한 기억을 비웃기라도 하듯, 할아버지의 마을 이름은 지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마을위치를 알아내는 단계부터 막힐 것이라고는 누가 알았겠는가.


  할아버지, 이 지도 언제 적 거예요?

할아버지  나도 몰라. 예전에 향우회에서 받았어.

  이 지도에서는 지덕면 송암리는 보이지가 않네요.

     위치를 알면 도움이 많이 될 텐데...


할아버지는 지도를 지긋이 보시더니 눈만 꿈뻑꿈뻑거리셨다. 눈이 잘 안 보이셨던 것 같다. 그리고선 나에게 지도에 어떤 지명들이 적혀 있는지 하나씩 알려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지도에 보이는 몇 군데를 알려드리기 시작했는데, 한 지명을 말씀드릴 때마다 할아버지로부터 돌아오는 대답들은 심상치가 않았다. 90대 할아버지의 기억은 꽤나 자세하여 처음에는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할아버지의 기억력에 감탄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내 평소와 달리 말을 많이 하시는 모습에 기쁘면서도 동시에 두려웠다. 그저 이 진귀한 장면을 넋 놓고 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본래 또다시 말수 없는 생활로 돌아가시기 전에 녹음을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화의 중간부터 녹음을 시작하였다.


평안남도 맹산군 지도. 출처: 북한지역정보넷.


  녕원? 영원? 녕원이 보이네요. 녕원은 멀었어요?

할아버지  녕원은 멀지. 덕천군이 더 가까워. 덕천군은 어디 있나?

  덕천시.

할아버지  그래, 덕천시야. 덕천시는 커요.

  덕천시가 동네 서쪽이었던가요?

할아버지  응.


덕천시의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 이름이 하나 보였다.


  산 이름 기억나세요?

할아버지  철옹산.

  여기에 1093m라 적혀있네요.

할아버지  근처에 강가가 있는데.

   (지도 위 철옹산의 위치를 가리켰다)

할아버지  이게 철옹산이란 말이야?


표정은 마치 이 산은 철옹산이 아니라는 표정이셨다.


할아버지  강이 이렇게 멀진 않았어.


지도에서는 철옹산과 근처 강과의 거리는 꽤 있었다. 하지만 강이 멀지 않았다고 하시는 걸 보아 확실히 강과 산이 동네 위치의 중요한 지표로 작용한다는 것을 느꼈다. 강까지는 가까웠고,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겠거니 했다.


  할아버지, 여기 강이 하나 지나다녀요. 마탄강이라고.

할아버지  어, 마탄강, 마탄강. 마탄강이야.

  그러면 여기인 건가.


점점 위치는 좁혀지고 있었다. 마탄강 주변의 마을 이름들을 하나씩 대보기 시작했다. 송암리라는 이름은 안 보였지만, 지도에 써져 있는 마을 이름을 하나씩 대다 보면 대략적인 송암리의 위치를 찾을 수 있으리라 싶었다.


  평지리는 어딘지 아세요?

할아버지   평지리는 지덕면이 아니야.

  용암리? 지성리?

할아버지  (답이 없으신 대신 다른 정보를 주셨다) 산맥은 낭림산맥이야. 물이 위에 있었어. 우리는 송암리인데.  

  송암리, 용암리.. 할아버지, 송암리가 용암리가 된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꽤나 고향에 대한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계셨구나 싶었다.


그리우신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 그립다고 밝히지는 않는 분이셨다. 본인의 감정을 마치 땅 속에 묻으신 듯했고, 심지어 그 위에 무거운 바위 하나를 올려놓은 듯했다. 그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조차 잘 안 하시려는 듯했다. 고향에 못 돌아가는 상황은 어떤 감정과 생각을 만들어낼까. “만약에 나였다면”이라는 상상의 기법은 별로 소용이 없었다. 나는 전혀 상상이 안 되었고 상상의 시작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답답함인가, 애통함인가, 슬픔인가, 무기력함인가, 공허함인가.


할아버지는 갑자기 펜과 종이를 찾기 시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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