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공부하겠다는 손녀에게 건네는 할아버지의 부탁
2018. 8月
2018년의 한 여름날, 할아버지와 했던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매주 일요일마다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는데, 그날도 여지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뵈러 갔다. 꽤나 화창한 날로 기억한다. 8월이었으니까 폭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점심 전이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할아버지 댁 TV는 진품명품을 틀어져있었고 그날은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우래옥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래옥을 참 좋아하셨다. 나랑 할아버지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는 평양냉면에 미친 자들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더 까다로우셨다. 나는 평양냉면 식당을 가리지 않는 반면, 할아버지는 무조건 우래옥이셔야 했다. 우래옥도 무조건 우래옥 을지로 본점으로 가셔야 했다. 거기가 가장 평양냉면을 잘한다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고향이 이북이시니까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평양냉면은 곧 우래옥"이라는 공식이 무의식 중에 각인되었다.
우래옥은 11시 30분 오픈이라 우리 가족은 매번 11시 15분 전에는 도착하곤 했다. 이는 수년간 단련된 우리 가족 모두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대기 명단 표에 이름을 올려 개장하자마자 바로 자리를 얻고자 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할아버지랑 내가 나눈 대화의 시간은 아마 10시 30분에서 11시 10분 사이가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적으셨다. 그 당시 할아버지의 연세는 91세이셨다. 날이 갈수록 점점 적어지는 말수에 우리 가족은 걱정 아닌 걱정을 많이 했었다. 다른 여느 날처럼 나는 할아버지가 항상 앉으시던 소파 옆에 앉아있었고, 우리 둘은 멍하니 진품명품을 보고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그날은 불현듯 말을 거셨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우리의 대화는 대충 아래와 같았다.
할아버지 요즘은 뭐 하면서 지내나?
나 건축 공부하려고요.
할아버지 여자가 건축하면 안 힘든가?
나 에이, 옛날 말이죠. 요즘은 안 그래요.
할아버지 건축 공부하면 뭐 배워?
나 뭔가 짓는 거를 배우겠죠?
할아버지 그래? 뭐 지을 수 있나?
나 글쎄요. 아무거나? 근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들어가 봐야지 알 것 같으니까 그만 물어보셔요(웃음).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임과 동시에 잊고 있던 대학원 학업계획서에 대한 고민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원서 제출까지 4개월 정도 남은 시점이라 슬슬 초안을 짜고 있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신 듯 보였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으시고 커피잔만 어루만지셨던 것 같다. 그러다 입을 떼신 첫마디.
혹시 내 고향 좀 다시 지어줄 수 있겠어?
나 고향이요?
할아버지 응. 내 고향.
나 진짜로 짓는 거요? 아니면 건축 모형 같은 거 원하세요?
할아버지 아무거나.
나 아무거나?
할아버지 응. 고향 관련된 거면 다 좋아.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냥 고향을 다시 보고 싶으신가 보다 했고, 모형 만드는 거야 학생 때 맨날 했던 것이니 그까짓 거 해보자는 마인드로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나 뭐... 해보죠. 일단, 할아버지 고향에 대해서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것 같으니까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부탁이 뭔가 긴 숙제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길고 쉽지 않은 숙제. 그 당시에는 할아버지의 별 대수롭지 않은 듯한 질문이 내 머릿속 한편에 오래도록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땅, 북한 그 어딘가가 이렇게 궁금해질 줄이야. 대체 할아버지 기억 속 고향의 모습은 어떠하길래 다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일까? 통일이 되어 북한 땅에 발을 내딛는 날이 오지 않는 이상, 아마 나는 계속 이 미지의 공간을 궁금해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