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게

우리의 행복했던 순간들.

by 블루나잇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가장 흐릿해지는 중이다. 시린 겨울 새벽녘 낯익은 행선지의 버스를 기다리는 면은 고난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뼛조각 하나하나까지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까마득한 길을 나서며 옳은 길인지도 모를 때가 있었다. 그 계절만 다가오면 아직까지도 그렇다. 막막해지는 시야 때문에 더욱 그렇다 느끼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두려운 기억을 좋아하는 일은 보통 드문데 나는 종종 추운 기억을 떠올리며 좋아했다.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달리 대체할 감정을 찾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유독 가슴에 깊이 매여있을 계절이 또다시 떠나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왔다가 대부분 떠나간다. 그들이 머물던 원래의 자리를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별안간 그리워지는 심정을 안고서 덜컥 찾아가고 싶은 밤들이 숱하게 남겨질 것 같아서였다.


누군가에게 무슨 계절을 제일 좋아하냐 묻는 의도에는 어서 내가 겨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 달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침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순간이면 마른 나뭇가지를 닮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뻣뻣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나는 겨울을 좋아해. 그런데 추운 날씨는 싫어해. 모순의 엉터리로 서론을 열며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임에도 한 편으로는 기뻐졌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얘기는 나를 자주 들뜨게 만들었고 찰나로 순결해지는 묘수를 깨닫게 해 주었다. 철없게 떠들어 대는 내가 하나도 바보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거 즐거운 것 같아 생경했다. 겨울을 좋아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수도 없었다. 언제라도 이유 없이 싫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유를 곱씹어 내야 했다. 대체로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습관에서 나온 흔적이었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는 뮤지컬 장막을 열듯 떨리는 목소리를 펼쳐 나갔다. 일단 나는 두껍고 따뜻한 옷을 입고 마치 굴러다니며 구름 위를 유영하듯 아장아장 움직이는 게 좋아. 투명한 물 위로 파스텔톤 물감이 퍼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걸어지는 느낌이 정말 근사해. 애쓰지 않아도 곧 괜찮아져. 겨울이 오면 그 해가 끝나간다는 뜻이기도 하지. 좋았든 나빴든 깡그리 사라진다는 뜻이야. 끝낸다는 건 시작을 꿈꿀 수 있다는 거잖아. 나는 주로 아팠으니까 그만 아플 확률이 최대치로 늘어나게 되는 거야. 이제껏 보다 더 아플 수도 있겠지만 일 퍼센트의 실낱같은 희망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들 아니겠니. 이리도 따뜻한 계절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끝과 시작의 중심에서 걔는 나보다 더 갈팡질팡 하겠지. 자주 모서리에 서있는 나를 안아주고 녹여주겠지. 그럼에도 가녀린 몸과 그렇지 않은 힘으로 꿋꿋이 버티고 다음 순서를 맞이할 거야. 견디면 이겨낼 수 있음을 일러주듯이 말이야.


주황 불빛들이 작은 초록집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어여쁨을 고스란히 느껴본 적 있니. 나에게 말을 걸듯 다가오면 어쩔 줄 몰라하며 그들보다 더 얼굴 붉히는 내 모습을 나는 차마 싫어할 수 없었어. 어쩌면 유일하게 싫어할 수 없는 모습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줄 알약만 한 핑계가 언제 당도할까 기다리면서 나는 나를 은근히 연민했던 것 같아. 실은 끔찍할 만큼 아끼면서 아닌 척했나 봐.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야. 만족하면 할수록 나는 작아질 것이 분명했거든. 늘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오히려 편안해 보이기도 했어. 오늘을 죽이며 내일을 살아가려 했지. 이미 죽어버린 오늘의 내가 어떻게 내일 살아있을 수 있을까 형용할 수 없는 실체를 고민하면서도.


혼자가 아닌 순간들 속에서 맞이하는 혼자의 순간들은 퍽 외롭고 가끔 다정했다. 무엇이 부족하냐 내게 물었을 때 무엇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는 슬픔이 나를 옥죄었고. 부족한 게 없는데도 슬플 수 있다는 게 이따금 최악의 환생 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계절이 있어서 괜찮았어. 는 풍요가 다른 이름의 결핍이라고 말했잖아. 네가 내게 쥐어 준 가장 샛노랗고 커다란 별 장식은 결국 지나간다는 의미였으니까. 너도 함께 지나갈 거라는 현실을 마주한 이후로 나는 한 떨기 피난민이 되어 홀연히 대비해야만 했어. 그래도 모든 게 부질없지는 않았어. 잊지 않을 순간까지 너는 몇만 년이고 몇억 년이고 기억될 존재였거든. 참으로 아프고도 따뜻한 겨울이었지. 아무것도 모르고, 림자처럼 숨겨져 내내 앓아눕기만 는 우리를 감싸주었던.


공백이 너무나 길었던 것 같아. 모두들 활기찬 시작을 꿈꾸지만 그 안에 저마다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잖아. 방울뱀의 모습을 하고 견고한 똬리를 튼 채로 걔들은 멋대로 떠났다 멋대로 돌아오곤 해. 나는 그래서 겨울이 좋아. 약속한 시간에 떠나고 약속한 시간에 돌아오니까. 꼭 돌아온다고 말하곤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믿고 싶은 위로이자 위안이니까. 걔가 있어야 비로소 내가 완성되는 기분이 들기도 해. 기약 없는 기다림은 아주 슬프거든. 돌아오지 않을 것을 기다려본 사람은 그 상처를 이미 알고 있어.


나는 계속 이 계절을 사랑하겠지. 조금은 다르고 조금은 변색된다 하더라도 아주 없어지지 않는 범주 내에서 원하고 바랄 거야.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돌아와 주는 고마움을 나는 배웠어. 유독 변덕스럽던 오늘이 지나고 다가오는 내일은 보다 빛날 거라는 사실도. 우리의 재회를 맞이할 미래에서, 나는 너를 더 아낄게. 이제 막 헤어졌지만, 벌써 보고 싶을 것 같아. 내가 늘 같은 자리에 있다는 걸 꼭 기억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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