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모르는 곳에 피어난 꽃이 참 예뻤습니다.
누군가의 상처를 바라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다. 요 며칠간은 핑계 하나를 모로 눕혀놓고 글씨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잉크의 맛을 떠올리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의욕을 끌어올리기 어려웠다. 나는 이따금 사랑이라는 묵직한 형체를 얕은 감정의 전이로부터 깨닫는다. 혼자보다 여럿일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그것은, 어쩌면 움직인다는 점에서 존재의 생동성을 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힘들 때, 괴로워하는 그를 보면서 아주 잘게 조금씩 매만지면서 다시금 사랑의 너비를 느끼곤 하였다. 당신의 심정을 전부 헤아리지 못하겠다는 말을 꺼내며 서론을 시작하지 않아도 될 만큼 뼈저리게 아파봤다. 시시각각 움직이는 내 사람의 크고 작은 모습들을 포착하고 척추 마디마디에 짙게 도사리는 우울까지 훑어보면서, 나는 히마리없이 이리저리 휘둘리곤 하였다. 차라리 내가 겪었으면, 대가로 내 행복을 지불해도 좋으니 그가 더 이상 힘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되뇌는 날도 있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누군가가 변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변화할 수 있음의 가능성이 아닐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상 유지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변화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 변화가 훗날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어떤 이의 인생에 깊숙이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희망을 심어줄지 미리부터 알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좋을지 나쁠지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다도 너무 아예 없어서. 나는 그저 평소와 같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길을 걷고 아무렇지 않은 척도 하면서 늦은 밤엔 그와 함께했다. 우리는 모두들 괜찮은 표정을 지었고 무너지지 않으려 했지만. 가끔은 몰래 눈물을 훔쳤거나. 상한 속을 나쁜 것으로 메꾸었거나. 더는 기다려주지 못하고 까무룩 잠들기도 했다. 그 무렵엔 알맹이 없는 위로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도 없다는 상실감으로부터 잦은 거절의 편지를 받았다. 언젠가 보내야 할 답신은 마음으로 꼭꼭 씹어 둔 뒤에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꺼내어 읽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지금이라는 시간에 당도해서야, 오랜만에 몰려오는 해방감을 마주하게 되었다. 청청한 위로에 취해 부둥켜안은 이들을 푸르게 살펴보았다. 사방에 물기가 감돌며 죽었던 것들이 생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잊었던 숨을 쉬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잿빛이었던 공간에 점차 희미한 색깔이 채워지고 있었다. 아빠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평안의 숨을 내쉬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정을 내뿜었지만. 마침내 제자리였다.
아니었던 것을 하나씩 돌려놓을 준비로 한창인 우리들에게. 그동안 많은 불안과 책임감에 힘들었을 한 사람에게. 푹 쉬어도 된다고 다독여주고 싶다. 전부라는 것은 결국 전부 사라질 수도 있는 것. 하나도 남지 않는 일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각자의 일생을 하루하루 먹어갈 것이다. 용기를 먹고 자신감을 먹고 안도를 먹고 휴식을 먹으며 내일 아침도 여느 때처럼 일어나 걷게 될 것이다. 강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쓰러졌을 때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에, 쓰러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자주 아프고 자주 울고 자주 슬프고 자주 사랑하고 자주 이별하고. 자주 그러다 보면 일어나는 법 정도는 자연스레 깨우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오뚝이는 일어나기 위하여 넘어진다고 했다. 우리가 오뚝이는 아니지만 역시나 일어나기 위하여, 넘어져있지 않기 위하여 살아가는 거라고 했다. 그리하여, 빼앗겼던 일상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하나만 약속할까요? 오래 무너져있지 않기. 벚꽃이 너무 예뻐서요.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으니까요. 사라질 그것들보다 대체 뭐가 더 중요하단 말인가요. 곧 아주 없어지게 될 것들을. 눈앞에서 피고 지는 순간의 살아있음을. 오늘은 꼭 하늘을 훔쳐야겠습니다. 하얗고 분홍스러운 영혼의 물결에 잠겨 정처 없이 흘러내리고 싶으니까요. 딱 하루만 그대와 함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사랑으로 기억될 모든 날에 우리는 함께 있었답니다. 기억해 주세요. 다 잊어도 좋으니, 그날들의 향기가 행복이었다는 사실. 단지 이것 하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