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에서 평행선으로

by 블루나잇

평행선에서 평행선으로.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나의 마음에서 너의 마음으로. 전부 알고 있다는 착각은 어떤 사이를 끊임없이 마모시키고 닳게 만들고, 직각은 직각과 비슷한 면모를 맞물릴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고개를 끄덕이던 것이 반드시 상처가 되었던 것처럼.


펜과 연필의 차이가 뭔 줄 알아? 연필은 쉽게 지울 수 있어 그렇지만 펜은 약간 주저하면서 지우게 돼. 겁을 내고 겁을 내지 않고. 쉽고 쉽지 않고. 그래서 무슨 결과가 나오는 줄 알아? 연필은 지우고 싶지 않을 때도 사라지게 되지. 펜은 지운다고 해도 흔적이 인위적이잖아. 너무 없고 너무 있음이 결국 아픔을 파생시키는 거란다. 그 둘은 서로를 보듬어 줬어. 서로가 가진 것을 서로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가 필요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다더라. 뺏고 빼앗기는 척을 쉴 틈 없이 했다며 너는 울곤 하였지. 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기망도 한 줄 보태었잖니.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우리는 이토록 치열하게 살았다면서. 없었던 일은 그저 없었을 뿐인데도 죄가 되는 날들이 있었다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점점 얇아지는 계절이었다. 우리 집 식탁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호밀빵 한 조각. 갈색 설움을 토해내는 사과 반틈. 그믐달을 닮아 살짝 어설프게 쪼개어진 내가 보였다. 찬밥처럼 식어버린 얼굴들도 있었던 것 같다. 엊그제 보았던 달은 달무리가 희끄무레한 낯선 달이었는데 나는 그 달을 언젠가 본 적 있다고 착각했다. 흰 띠를 둘러싼 전쟁 같은 복숭아 더미가 바닥에 진을 칠 때. 그제야 우리는 실감하였는지도 모른다. 당신과 나와 기억들이 모조리 쫓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음이 그것들과 우리의 간극을 좁히고 좁혀 피폐한 악몽의 습관으로 재발했음을.


작은 마음이 큰 마음보다 클 때가 있다. 큰 마음이 작은 마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보 같을 때도 있다. 크고 작음은 무지하다. 당신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숱한 낱말이 해질녘 노을을 타고 바깥세상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그 천 개의 무렵들이 까마득한 전생처럼 느껴졌다. 안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도 연민이라는 단어도 애증이라는 단어도 후회라는 단어도 그리고 이제는 미련이라는 단어가 남아있었을 텐데.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었다. 운명처럼 스스로가 스스로를 복기하는 것 같았다.


잊고 싶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것.

잊었으나 잊고 싶지 않았던 것.


더 아프지 않기 위하여 더 크게 아프고. 슬프지 않기 위하여 더 못살게 울어버리는 것처럼.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날이 밝고 날이 저물고 내가 너를 보고 네가 나를 보고 한 시도 바라보지 않으면 마음께가 시리고 적적해오는 무수한 시간들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는가. 닳아버리면 어쩌나. 그래서 우리는 바라보기만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하지 않아야만 해서 최대한의 행복을 버리고선 최소한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당신과 나를 위한 가긍의 일. 웃어본다.


평행선에서 평행선으로. 곡선의 가운데가 움푹 파인 것은 누군가 정해놓은 다른 누군가의 운명이라고 곱씹으면 조금 덜 아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평행선에서 평행선으로. 영영 만나지 않음에서 만나지 않음으로. 못 본 새 야위고 수척해진 빗줄기가 왕왕 우는 소리를 내었으나 나는 일별조차 건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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