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문양

by 블루나잇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다. 낯선 문양이 눈앞을 가로막아 서고. 다시 숨을 깊이, 더 깊숙이. 빙글빙글 사람이 돌고 천장이 뿌옇게 희어진다. 가만히 있어도 어딘가로 달려가는 것처럼. 달리는 일밖에 모르는 강바람이 된 채.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가 무슨 일을 황급히 맞이한 도시의 외로운 고라니 한 마리가 다시금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세운다. 미처 태세를 갖추지 못한 재난으로 덮치는 것이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따금 생경한 등장이라는 존재가 까만 뇌를 지배하는 것. 사람을 알고 사람을 알고 사실은 한참을 모르고. 무색무취인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구절이 사전에 등재되자 치부를 가리기 위해 최고급 명품 향수를 뿌려대던 이들은 어느덧 서로 없이는 향을 내지 못하는 무자비한 짐승이 되었다더라. 똑같고 똑같고 다르고, 다시 똑같고 하나도 다르지 않아 졌고. 초여름날 떠올라 끝 모르게 서글퍼진 장마 앞에서. 잠시 마침표. 아스팔트 사이에 딸기 씨처럼 끼어있는 무른 시냇물이 하염없이 목소리를 낸다. 졸졸 따라가겠노라 말하는 것인지, 자신을 구원해 달라 울부짖는 것인지. 어느덧 당신과 나는 뜨거운 잿더미에 앉은 사슴이 되어. 눈망울에 원망과 불안을 띄운 이름 모를 새끼 개의 모습을 하고. 우리를 자꾸 핥는다. 우리는 회색을 입었다. 금방이라도 생을 마감할 넝마를 둘러쓴 채. 이듬해 가장 산란한 온도였다 말하며. 웃어, 다시 웃어보자고. 위로인지 자조인지 알 수 없을 축축한 혀가 내 심장을 어루만졌다. 우리는 자꾸만 확인하려고 그것을, 살아있는 이름을. 이름으로써 죽지 않은 사체를 헤집고 파헤치고. 그로부터 몇 초 뒤,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버릴 기억은 영면으로 쉼으로 편안으로. 괴로움에 몸서리치던 날들로부터. 이제는 텅 비었다. 그곳은 비어있는 공터를 채우려 발악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시절이었다. 연식이 오래된 기차역 앞에는 세 개의 손으로 몇 십 년째 욕망을 어루만진다는 장인이 있었는데, 몰래 허영이라는 가락국수를 손수 뽑아 한 그릇씩 끼워 팔곤 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줄 서서 따라먹던 사람들. 불규칙하게 뽑힌 면발을 목구멍으로 깊이 흡입한 자들은 기도와 식도를 넘나드는 욕망의 불구덩이로 스스로를 가두었다는 후문이 돌았다. 저주나 다름없던 그 가게는 몇 개의 유통기한 지난 마음들을 호되게 처단하고서 소문 없이 문을 닫았노라. 짙푸른 머리의 노파가 낡은 어깨를 으쓱하며 흘러 내려오는 전설의 잔혹동화를 빌려 떠들어대곤 했다. 그리하여 원한다는 것은 죄악이자 형벌인가. 지독한 야욕 같은 절망들은 모두 태우고 떠나야 할 영생이라면, 당신의 눈앞을 계속해서 막아서는 낯선 문양의 정체는 무엇인가. 천사의 부름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을 때. 그것은 믿어야 하는 희망인가 거짓된 치욕이 불러일으킨 구원의 책망인가. 그 길로 나는 줄곧 걷기만 했다. 앞을 보았다. 뒤를 보는 일은 벌이지 않고 싶었다. 과거에게 삼켜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지우고 또 지우며, 불현듯 떠오르는 어렵고 싱그러운 밤공기를 애써 잊으며. 걷는 일이 애석해질 저녁 무렵엔 들판 위에 모로 누워 잠시 눈을 감아 보았다. 살구색 주황빛이 덤벼드는 노을에 흠뻑 몸을 내던졌다. 언제부턴가 나를 따르던 하얗고 조그마한 새끼 개가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어느 곳, 어느 날부터 우리는 함께였을까. 나는 영혼을 노리는 줄도 모르는 마녀에게 전부를 바친 하릴없는 나그네가 되어 아주 잠시만 쉬겠노라 답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때마다 개가 나를 핥았고. 구석구석 적셨고. 나는 맑은 얼굴로. 뜨거운 부름이 온몸에 닿으면 우리는 점차 초면의 문양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했다. 이상한 점을 깨닫고서 매번 낯설었던 이름을 해방시키는 길고 익숙한 도로 위로 빠져들었다. 뛰어들었다. 알 수 없던 것은 영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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