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때 우리 서로 좋아하면서
누구 하나 마음 들킬 새라
얕은 숨처럼 낮은 보폭으로 눈만 도록도록 굴려댔는데
네가 너무 싫다고 거짓으로 피칠갑을 둘렀는데
그럼에도 좋았잖아
아팠던 건 잘못했던 건 우리였으니까
머저리 같다
네가 쏟은 오렌지 주스 자국
아직 내 방 침대 시트에 남아있어
싸구려 주스라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
사실 일부러 안 빨았어
더 좋은 것만 먹일걸
나는 너를 더 예뻐했어야 했지
눈빛 순간이었다고 해도
상상해 너를 마주하는
우리가 함께였던 여름으로
다시 여름으로
2.
영원을 믿어?
아니
나를 믿어?
응
그럼 영원도 믿어, 나를 믿는다면
3.
활활 타는 것은 저기 저 모닥불인가요
아니면 파도치는 나의 심장인가요
차라리 꺼내어 보여줄 수 있다면
이토록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히아신스 꽃이 잿빛으로 일렁거릴 때
네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그러다 소리도 없이 흘러갔을 때
가둘 수 없는 것들이
시골 밤하늘의 별만큼 잔인하게 존재했으므로
4.
잠시 발 담갔다 떠날 거라면 다가오지 마
내가 흙탕물이 되면
수치스럽잖아
나는 이렇게 여전히 당신을
뒷말은 꺼내지 않았다
네가 사는 동네에 잠시 들렀던 날
엷은 민들레 홀씨를 하나 꺾어왔던 곳
텅 빈자리에 나를 심어두는 상상을 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우리
5.
맥없이 흔들리는 소형차 짐칸에서
나는 모로 누워 있었고
덜렁덜렁 천장에 목이 꼭 묶인 가방들이
죄수처럼 혀를 내미는 모습을
그 안에서 더 치욕 같은 내가 숨어있다는 사실이
어느 트로트가수 공연의 보조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그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미웠다 원망이 치솟았다 슬펐다
터널이라도 만나 허름한 차가 전복되는 꿈을 꾸었다
들숨과 날숨조차 민폐인 기분
미안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군요
6.
솜털을 닮은 하얀 웃음
네 물결 같은 손가락이 나의 뒷덜미에 닿을 때
이대로
이대로
봄이 왔다
7.
그대로 계속 머물러 줄 수 있어?
나를 살게 해 줄 수 있어?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
영영 떠나지 않을 수 있어?
내 울음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어?
내 우울에 이유를 붙여줄 수 있어?
또 이런다 지겹지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나 받아주지 마
하루라도 빨리 도망쳐
나는 너를 아프게만 하잖아
8.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바로 보이는 게
네 얼굴이어서 메마른 입술을
부드러운 손등에 부비면서도
나는 여전히 불안했던 것 같다
소중한 건 결국 사라진다고 이름 모를 사람이
잘못 같은 말로 나를 죽이고 간 거야
걷잡을 수 없는 마음으로
사실 그 편지들 전부 내가 보냈어
갖고 나면 소원해지잖아 사람은 다들 그래
그래도 내가 보고 싶다면
나는 언제나 네 마음 안에 있어
가끔 잊지 말고 꺼내 주라
싫으면 그냥 버려 그래도 돼
9.
물 안에서 네가 일렁거린다
내 얼굴을 집어넣었더니 네 미소가 나왔어
어떤 날은 분명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네 집 앞에 도착해 버린 거야 참 웃기지 내가 미친 것 같다면 너도 미친 척하고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살아있는 사람 소원 한 번만
우리가 끝났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산다
다시 만질 수 있을 것 같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언제라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지나간 일은 돌릴 수 없는 거지
알면서도
내 사랑이 너를 괴롭혀서 미안해
우리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봤던 네 집
정말 좋았어
그 어디에도 향긋한 네가 둥둥 떠다녔어
그래서 더 힘들어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아
행복하게 살아
0.
끝은 새로운 시작이지만
새로운 시작이 아까의 끝이었으면
바란 적이 있었다
우리는 미련한 사람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