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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치유 Apr 12. 2024

인생 처음으로 남자에게 차여보다

12/10(토) : 남자에게 차이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면 언제나 이전까지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와는 별개로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청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같이 시험이 끝난 친구와 밥을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사건의 발단은 T군과 Y양과의 예정된 모임에서 시작된다. 연애를 반대하고 저녁도 본가에서만 먹어야 하는 T군과 한국인 Y양 맞다. 둘과 같이 시험이 끝난 만큼 셋이서 다시 밥을 먹어보고자 했는데, Y양은 시험이 끝나고 피곤해져서 다음에 만나자고 해서 T군과만 같이 식사하기로 했다.


 단 둘이 먹는 만큼 T군은 자신이 좋아하는 "중국식 일반식"을 파는 집으로 데려가주겠다고 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홍콩 이공대에서 침사추이로 가는 거리의 중간에 껴있는 조그마한 식당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이 앞을 지나갔었는데, 너무 조용한 디자인이라 여기에 이런 가게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T군의 주문은 정말 신비했다. 홍콩에서 2개월 넘게 있었던 나도 한국인 룸메이트인 호 형의 소개로 다양한 홍콩 음식을 먹어봤다고 자신했는데, 그런 내 경험에서 벗어난 음식들만 쏙쏙 골라져 나왔다. 인생 처음으로 계란이 겉부분만 검은색이 아니라 노른자도 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었다.





 이 음식을 피단(皮蛋) 또는 송화단(松花蛋)이라고 하는데, 달걀을 흙과 재, 소금과 석회를 쌀겨와 함께 섞어 두 달 이상 삭혀서 만든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노른자 부위는 까맣게 변하고 흰자 부위는 투명한 갈색이 된다는데, 개인적으론 흑단(黑蛋)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꺼매 보였다. 맛은 엄-청 짰다. 삶은 계란을 농도 99%의 소금물에 섞어먹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연한 국수 위에 얹어먹으면 한국에서 짠 스팸에 밥 먹듯이 중국 사람들에게 밥도둑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외에도 여러 요리가 있었지만, 뼈에 붙은 고기를 찌는 갈비를 힘줄에도 적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맛은 갈비와 비슷했지만, 갈비고기 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뼈 대신에 힘줄이 들어가 있어서 쫀득한 식감이 혀를 자극했다.


 그 외에도 여러 요리가 주문되어서 T군의 설명을 들으며 하나씩 맛을 보던 도중, 그 일이 일어났다. T군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오더니, T군이 잠깐 나가서 받고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의 통화를 엿들을 생각이 없는 착한 한국인이었기에 - 사실 광둥어를 어차피 들어도 이해 못 하니까 그냥 편하게 하고 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갔던 T군이 돌아온 것은 약 5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돌아온 T군이 자리에 앉아 다시 식사를 할 줄 알았는데, T군은 그대로 서있었다. 그제야 T군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보니 표정이 뭔가 좋지 않아 보였다. 굉장히 미안해 보이는 얼굴.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T군은 미안하다며, 지금 나가봐야겠다고 말했다. 바로 요 근처에 자기 여자친구가 갑자기 와서 점심을 먹자고 하길래 같이 가서 먹어야겠다고. 그래서 지금 자리에 있는 식사는 자기가 결제할 테니 그냥 먹고 나와달라고.


 그 말을 듣고는 나는 그냥 내가 결제하고 갈 테니 걱정 말고 여자친구 만나러 가라고 말했다. 고마워하며 떠나는 T군을 쿨하게 보내는 내 겉모습과 다르게 속은 굉장히 씁쓸했다.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데도 여자친구를 만나러 갈 정도면 T군이 여자친구한테 잡혀사는 건가 싶었다. 나라면 차라리 밥을 조금만 먹고 빠르게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어느새 밥맛이 뚝 떨어지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차였는데, 그게 여자도 아니고 나랑 같은 남자에게 차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결국 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그냥 결제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정말 어느 나라나 사랑은 눈을 멀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과 T군에 대한 작은 원망을 발소리에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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