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욱, <相見歡(獨上西樓)> 감상
無言獨上西樓, 月如鈎。
寂寞梧桐深園, 鎖淸秋。
剪不斷,理還亂,是離愁。
別有一番滋味, 在心頭!
<낭송: 소오생>
남당南唐(937~975)의 마지막 임금, 이욱李煜(李後主; 937~978)!
그는 경국지색의 자매, 두 여인을 황후로 삼고 꿈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행운아였다.
그는 음악과 미술과 문학, 무엇 하나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던 다재다능한 천재 예술가였다.
그러나 하늘의 시샘이었을까,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일삼았던 인과응보였을까?
그는 끝내 나라를 망친 망국의 한을 안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기막힌 운명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송宋 나라를 세운 조광윤趙匡胤에게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다가 독살당하고야 만 것이다.
어쩌다가 임금으로 잘못 태어났던가. 슬픈 천재 시인 이욱이여!
하지만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을 초월한 시각에서 다시 한번 그의 삶을 바라볼진대, 길고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연 어떤 것이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하였던 것일까?
천재 시인 이욱은 그러나 행복했던 삶의 전반기 시절에는 그다지 좋은 작품을 쓰지 못했다.
오늘날 중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그의 위치는 전적으로 후반기 포로시절에 남긴 작품 덕이다.
여기 이 <말없이 누각에 오르니...> 역시 바로 그 포로시절에 남긴 것이리라.
때는 늦가을.
오동잎 떨어지는 이 계절마저 자신의 신세처럼 이 깊고 깊은 정원에 갇히었는데,
누각에 올라보니 달마저 이지러져 갈고리처럼 자신의 마음을 찍어내듯 파고든다.
그리운 그대여.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그리운 고향이여, 그리운 내 나라여!
어쩌다 내 손으로 망쳐버리고 말았던가!
괴로운 생각(思)은 길고 긴 실(絲)이 되어
끊으면 이어지고, 애써 가지런히 정돈하면 또 이내 헝클어져 버린다.
'그리워하다, 생각하다'는 한자로 '사(思)'이다. '실 사(絲)'와 발음이 같다. 중국 시에서는 그 점을 이용해서 '그리움'을 '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아, 가슴을 에는 이 심정.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 심정은 대체 무엇이라 부르는 것일까.
불과 한 컷의 이미지 만으로 구성된 간결한 언어.
참으로 기가 막힌 가을과, 기가 막힌 심정과, 기가 막힌 시어들이
그 한 장의 적막한 사진 속에서, 낙엽처럼 우리들의 마음으로 한 잎, 두 잎, 날아온다.
깊어가는 이 가을밤,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시는가.
《獨上西樓 》노래, 낭송: 덩리쥔(鄧麗君)
이 노래 역시 중국인이 아주 좋아하는 노래다. 이 기회에 잘 익혀두시라. 짧으니 배우기도 쉽다. 혹시 누가 아는가?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훗날 중국을 이끌어가는 리더 그룹과의 자리가 생기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가 마침 오늘처럼 깊어가는 가을날이라면, 덩리쥔의 이 노래를 한 번 불러보시라. 그 중국 친구들은 무릎을 치며 환호할 게 틀림없다. 그 기회에 그들과 진정한 꽌시를 맺어보시라. 중국에서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절대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정말이다. 소오생의 말을 '아멘'으로 믿으시라.
중국시는 70%가 노래 가사다. 선진 시대의 《시경》으로부터 한나라와 위진남북조 시대의 악부시에 이르기까지 '시단詩壇'의 주류는 민간 가요였다. 민간이 주도하는 유행가의 가사가 바로 '시'였다. '시'와 '음악'은 하나였던 것이다.
중국 시는 당나라 때 들어와 큰 전환점을 맞는다. 역사상 최초로 인재를 발탁하는 과거 시험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그 시험 과목이 '시'였던 것이다. 그 바람에 지식인들이 멜로디와 괴리된 '시'를 짓기 시작한다. '시'와 '음악'이 분리된 것이다.
그러다가 당나라 말에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한다. 멜로디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시', 즉 '사詞'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 당시 흥성하기 시작한 기녀 문화가 크게 영향을 주었다. 지식인들은 기녀들과 교제하면서 노래 가사를 지어 선물로 주고, 기녀들은 그 가사를 노래로 불러 유행시켰다.
그 당시에는 멜로디가 그다지 많지 못했으므로, 지식인들은 똑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바꿔 넣었다. 여기 소개한 <상견환 相見歡>은 멜로디 이름이다. (전문용어로 '사패 詞牌'라고 한다)
그런데 <상견환>이라는 멜로디로 '사'를 지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심지어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멜로디로 '사'를 여러 번 짓기도 했다.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가사의 맨 처음 네 글자(여기서는 獨上西樓)를 제목으로 함께 표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국시는 두 갈래로 나뉜다.
(1) 음악과 분리된 '시'.
(2) 음악과 결합한 형태의 '사'.
주로 지식인이 작사하고, 기녀가 노래를 불러 유행을 시키고, 대중들이 따라 부르는 식이었다.
최초의 노래 가사 모음집 이름은 《화간집花間集》. 오대십국 시대 후촉後蜀의 조숭조趙崇祚라는 사람이 편찬했다. 꽃밭 사이라니, 이름이 참 절묘하다. 그만큼 사를 유행시킨 기녀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 노래의 소재는 또 어떠했겠는가. 보나 마나 뻔하다. 90% 이상이 문인과 기녀들이 짧은 사랑을 주고받다가 헤어질 때 울고 짜고 하는 신파조다. 아무튼 그 《화간집花間集》에 18명의 시인이 소개되었는데, 후세 중국문학사에서 그들을 '화간파'라고 한다.
오늘 소개한 이 노래를 지은 이욱李煜은 남당南唐(937~975)의 마지막 임금이자 두 번째 임금이어서 흔히 이후주李後主라고도 불린다. 화간파의 제일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 노래 '멜로디의 제목(사패, 詞牌)'은 <상견환 相見歡>. 원래는 남녀가 만나서 즐거움을 누릴 때 부르는 멜로디지만, 그는 정반대로 이별의 애통함을 노래하여 일반 화간파 작품들보다 예술적 수준이 훨씬 뛰어나다.
그 후 중국의 유행가는 크게 세 파로 나뉘어 발전한다.
(1) 화간파를 이어받아 남녀 간에 지지고 볶고 울고 짜는 나약한 사랑을 노래한 완약파.
(2) 우주와 인간사의 철리를 노래한 호방파. 하지만 멜로디를 무시한 측면이 많아서 크게 흥성하지는 못했다.
(3) 망국의 한을 노래한 청공파.
다음에는 후세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유행가인 완약파의 노래를 감상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