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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20년 전의 편지

[제1부] 2003. 1. 14.

by 소오생 Dec 0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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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울릉도를 그리워했다. 수평선에 한 점의 섬도 걸쳐있지 않은 망망대해를 가보고 싶었다. 아득한 그 끝 어드멘가 우뚝 솟아 있을 울릉도 성인봉! 그곳에 올라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보고 싶었다. 수평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는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울릉도는 나에게 신화와 전설 속의 장소나 다름없었다. 몇 번이나 울릉도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한 번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2003년 새해가 되었다. 울적했다. 혼자서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문득 울릉도 생각이 났다. 막상 떠나자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행사를 통해서 가기는 싫고, 막연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울릉도 전문 사이트가 있었다. '섬백리香'이라는 파스텔 톤의 아주 예쁜 사이트였다. 주인장 이름도 사이트의 이름과 똑같은 '섬백리香'이었다. (본명은 이은경 님) 섬백리香? 무슨 뜻일까? 울릉도 나리분지에 자생한다는 야생화인데 향기가 백리를 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사이트에서 먼저 숙소를 알아보았다. 섬백리香 님은 저동에 있는 '고바우 민박집'의 주인 어르신과 각별한 친분이 있어 보였다. 울릉도 여행의 중심지인 도동이 아니라 저동에 있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찾아갔다. 민박집은 낡고 헐었다. 그러나 주인 고덕진(77) 어르신은 인정이 넘쳐흐르는 너무나 좋은 분이셨다. 함께 지내는 동안 친자식처럼 나를 아껴주셨다.


9박 10일 동안 낮에는 하염없이 걷고, 밤에는 글을 썼다. 현지에 있는 PC방에 가서 필자의 개인 사이트에 글을 올렸는데, 어르신께서 내가 밤마다 나가는 연유를 궁금해하시길래 설명을 드렸더니 그 내용을 '섬백리香 사이트'에도 꼭 올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래의 글은 어르신의 분부대로 20년 전인 2003년 1월 14일에 섬백리香 사이트에서 섬백리香 님에게 보낸 편지다. 참고로 필자의 개인 사이트와 '섬백리香 사이트는 20년 성상星霜에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섬백리香 은경 님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모 대학 중문과 교수로 있는 소오생이랍니다. 하지만 교수라는 호칭은 딱 질색이에요! ^^;; 보잘것없는 개인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중국과 중국어, 중국문화와 역사 지리, 중국문학 등을 강의하고 있답니다. 동영상 강의도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생긴 인간(^^)인지는 클릭해 보시면 아실 거예요. 나이는? 비밀. 하지만 마음만은 은경 님이나 매한가지임을 보장드리나이다. ^^     


저는 지금 울릉도 저동에 있는 피씨방 5번 좌석에 앉아있어요. 어쩌면 은경 님이 울릉도의 밤마다 들러 자판을 두드리던 바로 그 자리인지도 모르겠군요. 한 번도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은경 님에게 짙은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는 매개체들, 인터넷, 고덕진 어르신, 그리고 무엇보다 울릉도라는 곳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울릉도는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곳이었지요. 여행을 아주 좋아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녀봤지만, 이상하게도 울릉도는 좀처럼 와 볼 기회가 없었답니다. 이번에는 아주 큰 마음을 먹고, 그 옛날 그리운 그 시절처럼 혼자서 배낭 하나 둘러매고 울릉도를 찾았답니다.




은경 님, 정말 고마워요. 이유는? 우선 두 가지쯤 꼽아볼까요? ^^


첫째는 파스텔 톤의 향기로운 섬백리향 사이트! 울릉도 사랑이 가득 넘쳐나는 그곳에서 고덕진 어르신과의 인연을 엮어준 감사함이죠. 은경 님 덕택에 찾아온 이 민박집은 바로 제가 그리워하던 그런 곳이었답니다. 이곳을 찾아온 지 오늘로 7일째, 그동안 두 분 어르신과 함께 지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정말 많이 났답니다. 식사 후 부엌에서 그릇 정리를 도와드릴 때, 거동이 조금은 불편하신 할머님 뒷모습을 보며 실수(?)로 "어머니"라는 호칭이 나올 뻔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죠. 두 분께 받은 온정은 치열하게 절벽을 올라가야 하는 삶에 너무나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둘째는 걸어 다닐 수 있는 젊음을 선물해 준 감사함!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혼자 등산도 많이 다니고 무전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낭 하나 둘러매고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사막도 싸돌아다녔죠. 근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이도 점점 많아지고(ㅜㅠ)  직업상 거의 컴 앞에 붙어지내다보니 몸 컨디션이 영 안 좋았거든요? 무엇보다 문득 찾아온 무릎 관절염이 젊음을 떠나보내는 증거인 듯하여 못내 허망했답니다.


그러다가 은경 님의 도보 여행기를 읽으며 그 옛날 나를 보는 느낌에 자못 흥분이 되었죠. 다시 한번 그 시절로 돌아가, 걸어서 울릉도를 일주해 보겠다는 의욕에 불타올랐답니다. 여행을 마친 시점에서, 지난 며칠 간의 도보 여행을 돌이켜봅니다. 젊음을 되찾은 듯한 힘찬 이 느낌! 정말 감사해요.




오늘은 함박눈이 퍼붓고 폭풍주의보가 내렸네요. 조금 전 내수전 올라가는 바람 길목에서 바라본 함박눈 속 집채만 한 파도는 정말 장관이었답니다. (보고 싶죠? ^^) 제가 여기 도착한 이후로는 날씨가 봄날 꿈같이 아름다웠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고운 하늘과 맞닿은 일망무제의 짙푸른 수평선 위에서, 붉은 해님이 스프링처럼 힘차게 솟구쳐 오르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군요.

저동 촛대바위에서 바라본 일출. 2003.1.9.07:30저동 촛대바위에서 바라본 일출. 2003.1.9.07:30


싸락눈 맞으며 허리까지 쌓인 눈을 뚫고 내수전 상봉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니, 수직 절벽 아래 펼쳐진 동화 속 마을 저동의 정다운 풍광을 잊지 못합니다. 도동에서 사동을 지나 남양, 구암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 은빛 비늘처럼 푸른 바다를 눈부시게 수놓은 그 환상적인 광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걷고 또 걸으며 신비의 섬 울릉도에 감탄, 또 감탄!!!  

울릉도 남서해안 남양의 골계마을 앞을 지나며. 2003.1.9.14:20울릉도 남서해안 남양의 골계마을 앞을 지나며. 2003.1.9.14:20

제주도도 가보고, 홍도, 거문도, 백도도 가보았지만 울릉도가 역시 최고의 신비로움이군요! 십여 년 넘게 광활한 중국 대륙 팔천리길 쏘다니며 이국의 산하에 떠도는 구름과 달을 음미해 보았지만, 역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참으로 비단 같은 금수강산임을 새삼 울릉도에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브런치 글 이미지 4

무릎까지 푹, 푹, 빠지는 태하령을 넘는 눈길! 그윽한 계곡의 정취를 마음껏 가슴에 담아 가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하염없이 올라가던 짜가 김삿갓(삿갓은커녕 모자도 안 썼지만. ^^), 울릉나그네 된 제 모습이 눈앞에 보이네요.

태하령의 눈길. 저 곳을 헤치고 넘어갔다. 2003.1.11.15:10태하령의 눈길. 저 곳을 헤치고 넘어갔다. 2003.1.11.15:10

984m, 우뚝 솟은 성인봉! 전망대까지 삼켜버린 눈에 쌓인 정상에 올라섰을 때의 그 가슴 벅찬 희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짜릿한 기분이었죠. 백두대간의 끝이 자리 잡은 북쪽 바다에서 밀려오는 호연지기를 오래오래 음미해 보았답니다.

성인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나리분지. 2003. 1.13.12:00성인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나리분지. 2003. 1.13.12:00

봅슬레이라고 하던가요? TV에서나 보던 겨울 올림픽 종목 말이죠. 성인봉 정상에서 나리분지까지 60도 급경사의 계곡을 온몸을 드러눕히고, 단 십 분간에 미끄러져 내릴 때의 그 아찔아찔한 짜릿함은 아마도 생애 최고의 스릴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산삼 먹은 물, 나리분지의 신령수를 마시다가 아이젠 때문에 균형을 못잡아 한 발 옆으로 밟다가 그만 풍덩! 그날 밤, 고덕진 어르신께서 그 얘길 듣고 정겹게 말씀해주시더군요.


아, 증말 잘하셨서. 그게 최곤기여. 일부러 그라믄 안 되지만 그렇게 우연히 빠진 게 산삼 물이니, 아, 증말 슨상님 운수 대통하신기여!


비록 천부까지 내려오는 동안 발은 내내 척척(?)했지만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답니다. 나리분지에서 내려올 때 섬백리향을 보고파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드디어 표지판 발견! 아쉽게도 일 미터가 넘는 눈에 쌓여 섬백리향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답니다. 눈을 감고 은경 님이 소개해준 그 그윽한 향기를 상상 속에서 음미하는 걸로 아쉬움을 대신해 보았죠.

눈 덮인 나리분지의 너와집. 2003. 1.13. 15:40눈 덮인 나리분지의 너와집. 2003. 1.13. 15:40


장쾌한 촛대바위의 일출부터, 꿈결 같은 남서 전망대의 일몰까지, 성인봉의 정기와 나리분지의 신비함! 그리고 덤으로 하루 푹 쉴 수 있게 도와준 울릉도의 파도와 함박눈이 저를 무척이나 행복하게 합니다. 대자연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혼자서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법이라죠? 이곳 울릉도에서 얻은 간절함과 절실함, 그리고 치열함으로 우리의 현실 앞에 놓인 새로운 한 해의 절벽을 올라가고자 다짐해 봅니다. 다시 한번 섬백리향 은경 님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삼선암과 울릉도 동북 해안. 2003. 1.15. 14:30삼선암과 울릉도 동북 해안. 2003. 1.15. 14:30




[보태기]      


피씨방에 간다고 하니, 고 어르신께서 은경 님 사이트에 꼭 글 올려보라고 하시네요. ^^ 어제도 은경 님의 전화를 받으셨다면서, 여기에 예쁜 사진 올려주신 조민경 님께도 안부 전하라는 말씀!      


아, 난 은갱이(^^)가 밤마다 나가갈래 그 참 희한허네~~

야가 바람이라두 났나, 그랬더니 슨상님 말씀 들으니께 그게 아니었구먼유?      


하하, 내가 밤마다 나가서 제 사이트에 '울릉 보고서'를 매일 올렸더니 어르신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시길래, 인터넷이란 게 이런 거예요, 설명을 드렸더니, 그 고운 얼굴을 활짝 펴시며 파안대소하시는 고덕진 어르신! 세상은 역시 살만 하지요?




[ 응원의 댓글 ]     


百里香: 젊음이 뚝뚝 흐르는 울릉도 여행 (2003-01-14 17:42:48)     

안녕하세요 교수님! 요즘 들어 인터넷이란 매체 장점을 톡톡히 보고 있는 섬百里香이라 하옵니다. (아시죠?) ^^ 할아버지께서 전화로 교수님 이야기 많이 하시더라구여. 교수님의 힘겨운? 여행기에는 젊음이 뚝뚝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교수님 홈에 올라가 있는 글을 여기다가 퍼 와도 될는지요? 겨울이라 여행객들이 성인봉 등반이나 도보 등을 많이 겁내 하시는데, 교수님의 글을 보고 사람들이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허락해 주실 꺼져? 울릉도 간령에서 참맨 오라버님(사진 올려주시는 오빠)이 화분에 담아 온 섬백리향이 여름에는 수북해져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드리고 싶어 집니다. 교수님께도 기회가 된다면. ^^ 앞으로 남은 일정에 울릉도 날씨가 도움이 되길 빕니다.      


소오생 (2003-01-18 21:28:52)  

이쁘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지금쯤 울사모 모임이 한참이겠죠? (부러버라..^^) 제 글을 올리기에는 너무 주제넘은 짓인 것 같군요. 하지만 섬백리향 님이 하명하신다면야 당근 그렇게 하고 말고요! 조만간 제가 조금 손을 보아서 직접 여기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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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맨 (2003-01-14 17:44:42)   

멋진 소오생 교수님!!!!!

멋진 울릉도에서 멋진 여행을 더욱 건강하게 마무리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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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경(2003-01-15 10:13:00)  [re] ^^

그곳의 근황을 이런 식으로 접하게 될 줄이야..

님께도 은경 씨께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즐겁고 건강한 여행... 마무리 또한 멋지게 하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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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2003-01-16 22:13:05 )      

가이더 님! 정말 좋은 곳에 계시네요~ 울릉도! 막 샘이 나네요. 부러워라~ 젊어지신 것 같아요. 참 가보고 싶네요! 울릉도~ 호박엿만 맛있는 줄 알았는데... 호박엿 사다 주실 건가요? 한 해의 시작을 좋은 곳에서 하시니 그 기운을 입어 기쁜 일만 가득하세요! 새 학기에는 나그네들에게 더 멋진 여행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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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학생들은 저를 가이더라고 부른답니다. 저는 모든 수업을 ‘여행’이라고 부르거든요? ^^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그리움 여행! 공부가 뭐, 별거겠어요?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쵸? ^^

나는야, 우리들 그리움 여행의 어설픈 가이더... ㅋ     

브런치 글 이미지 9




[ 표지 사진 ]

◎ 울릉도 성인봉 정상


사진은 당시의 값싼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화질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레트로 감성의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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