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뚜껑 >
사실 누구나 이상한 버릇 한, 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아내는 특이하게도 뚜껑을 열어놓는 버릇이 있어 심심찮게 엉뚱한 문제를 일으키곤 합니다.
그러니까 밥을 푸고 나서 솥뚜껑을 열어 놓는다던지 콜라를 마시고 병뚜껑을 열어놓는다던지 해서 그만 김이 모두 새버리기도 하고, 참기름, 들기름을 쓰고 나서 병뚜껑을 열어놨다가 엎어지는 바람에 아까운 기름을 얼마 먹지도 못하고 다시 산다던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요샌 세탁기뿐만이 아니라 김치냉장고까지 뚜껑처럼 위에서 열었다 닫았다 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도 뚜껑이라고 생각했는지 김치를 꺼낸 다음 좀체로 닫아 놓는 법이 없고, 변기도 쓰고 나면 뚜껑처럼 생긴 덮개는 당연한 것처럼 닫지를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민들이 쇠고기 값이 비싸서 고기 맛을 보기가 힘들다고 할 때에도 우리 부부만은 양질의 담백질을 충분히 섭취하는 편입니다. 뚜껑열린 찌개냄비에 날파리들이 가미가제처럼 날아와 머리를 처박기 때문인데, 하긴 팔팔 끓는 물속에 처박혔으니 화장실이나 쓰레기통에서 나온 똥파리라 하더라도 위생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 것으로 판단은 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건데, 이는 첨단의 21세기를 사는 문명인으로서 결코 언제까지나 너그러이 묵과할 수만은 없는 문제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보릿고개가 다시 돌아온 것도 아닐뿐더러 김빠진 콜라에다가 날파리국을 끓여 먹고 살아야 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은데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만 하겠습니까?
내가 수시로 주방을 기웃거리는 것은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부끄럽게도 뚜껑을 닫으러 드나드는 것입니다.
해서 저는 입술을 깨물 것까지는 없었지만 언젠가는 꼭 한마디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그런지가 벌써...,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느낄 따름입니다.
하지만 금년에는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신정, 구정 할 것 없이 나이를 먹어 각각 두 살씩이나 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큰 맘 먹고 엊그제 사랑하는 아내에게 점잖게 한마디 하고 말았습니다.
“여보, 이젠 우리도 뚜껑을 닫고 삽시다. 쓰레기통, 변기통에 뚜껑을 닫지 않으면 냄새가 나고, 냄비뚜껑, 솥뚜껑 안 닫으면 위생에 문제가 있고, 냉장고 뚜껑 안 닫으면 전기료가 많이 나오거든...”
“뚜껑? 당신이나 쉽게 쉽게 자주 열어놓지 마시구려. 건강에 해로운거 알잖우?”
“얼래? 내가 무슨 뚜껑을 열어놨다고 그래? 지금 당신 애기 하는 거라구.”
“얼래는 무슨 이 추운 겨울에 얼어 죽을 얼래? 남의 흉은 잘 보구 자기 뚜껑 열리는 것은 모르남? 운전 하믄서 뚜껑 열구, 신문, TV뉴스 보믄서 뚜껑 열구, 물건 사다가 비싸다고 뚜껑 왕창 열구... 뚜껑 뚜껑 뚜껑... 정말로 뚜껑 안 열었수?”
에구구,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새해 들어 첨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정말 나는 작년에도 얼마나 많은 뚜껑을 열었던가? 정말, 정말로 우린 너무 쉽게 뚜껑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다못해 몇 년 전 어느 연극영화과 대학생이 현장연기를 실험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허구의 결혼식을 올렸을 때에도 우리는 젊은이들의 신선하고도 과감한 예술적 시도에 대한 칭찬과 박수대신 경솔하게도 속았다며 뚜껑을 열어제꼈으며, 음흉하고도 치밀하게 독도를 빼앗으려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적 도발에도 우리는 실속 없이 뚜껑만 열고 말았습니다.
자, 신사 숙녀 선배님 여러분!
금년엔 누구보다도 복을 많이 받으셨겠지요? 하지만 경제가 어려운 요즘 저 또한 더욱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의 선배님들처럼 뚜껑은 꼭꼭 닫아버리고 그 대신 가슴을 활짝 열어 놓으려 합니다. 복은 가슴으로 들어와 뚜껑이 열리면 빠져 나간다고 들었거든요.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 모두 함께 힘차게 외쳐볼까요?
"뚜껑은 닫고 가슴을 열어라!"
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