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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섭 Feb 27. 2023

콩트 < 정아가 보낸 이메일 >

< 정아가 보낸 이메일 >

  

며칠 전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의 스타이시며 시집 "연두부는 모른다"의 저자이신 조정아 시인께 항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야 항상 팬의 입장이니 스타에게는 못마땅한 부분에 대하여 약간의 항의는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인의 홈페이지에는 왜 여성배우 톱스타 사진을 올려놓고 자신에 관계된 사진은 없는 겁니까?

차라리 자신의 사진이 부끄러우면 가족 중 아가들 사진이라도 올려놓으셔. 아무리 여성배우 톱스타가 미인이라 하더라도 그것만 하겠소?"

"아유 근데요, 제가 사진 올리는 방법을 몰르거덩요, 대신 올려 주실래요?"

"그러슈,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요, 그럼"

"내 사진요, 애기들 사진요? 호호호"

"뭔 소릴 하는 거요, 시방? 차라리 둘 다 보내슈."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매일같이 수신메일을 점검해도 시인께서 보낸 메일은 없었는데, 얼마 전, 민속의 날 바로 전날 "발신자 : 정아"라는 이메일이 왔습니다. 제목에는 "정아예요, 주문하신 거 보내 드립니다."라고 되어있었습니다. 솔직히 누구한테나 아무것도 주문한 것이야 없지만, 사진 보낸다는 것을 그렇게 제목을 달았나 보다. 하고는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시간은 금이니 약간 급하기도 하여 얼른 제목을 클릭했습니다. 

그런데 크게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라도 다음 화면에서 조금 야릇한 건, 두 가지 선택사항 중 하나는 "만 19세 이상"이라고 쓰여 있고 또 하나는 "수신거부"라고 써 있었는데, 이때 중학교 1학년 짜리 처조카 꼬맹이가 "저 왔어요." 하고 소리치며 집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냥 반가운 나머지 다른 건 자세히 읽지도 않고 별 생각도 없이 당연히 "만 19세 이상"을 클릭하였습니다. 뭔가는 몰라도 조금 뒷맛이 썩 개운치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드디어 처조카가 신발을 벗고 천천히 거실로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가 났습니다. 이어 주방에서 떨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아마 물을 마시고 오려나 봅니다. 


잌크, 그런데 이게 뭡니까? 클릭하는 순간, 갑자기 눈앞의 모니터엔 번쩍번쩍하면서 쭉쭉 빠진 미끈한 여성의 홀딱 벗은 이상한 사진과 함께 동영상이 왔다리갔다리하며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고도 요란스런 별천지 광경이 펼쳐지는 데 금방 정신이 홀라당 나가 버렸습니다. 그 이메일은 조 시인의 메일이 아니라, 바로 포르노사이트의 유인 메일이었던 것입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손은 떨리는데 솔직히 바로 말하자면 그곳의 홀딱 벗은 여성이 조 시인만큼은 못하겠지만 꽤 예쁘게 보인 것은 사실인데 허나, 이걸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아 물론 조 시인의 구체적인 몸매야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조카 꼬맹이는 점점 다가올 텐데, "창 닫기"버튼을 누르면 또 다른 화면이 두세 개씩 펼쳐지고, Alt+F4 버튼을 눌러 또다시 창을 닫아도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새 창이 번쩍번쩍 나타나며 마음은 급하고 컴퓨터의 Reset 버튼을 눌러도 도통 들어먹질 않았습니다. 급한 대로 모니터를 끄려 해도 수개월 치 용돈으로 큰맘 먹고 새로 산 무슨 LED모니터의 OFF버튼이 어디 박혀 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비상수단으로 "잠깐!!!"하고 소리치고는 방문을 쾅! 닫아 버리면서 잠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컴퓨터에 연결된 모든 전원 코드를 왕창 뽑아 버렸습니다. 다행히 꼬맹이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이젠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었습니다. 진땀이 나는지 안 나는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휴우~ 하고 한숨을 쉬고 다시 문을 열어 떠 떨리는 마음으로 처 처조카에게 말했습니다. 


"어서 와라, 바 밥은 먹었니?"

"밥요? 근데 내가 오니깐 왜 문을 쾅 닫아요, 기분 나쁘게? 쳇!"

"아, 그...저... "

"알았어요, 그럼. 갈게요, 흥!" 


그리고는 해명하거나 붙잡을 새도 없이 휙~ 하니 나가 버렸습니다.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전동차에 받힌 사람모양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처조카 꼬맹이였습니다. 


"이모부, 전데요... 정말 기분 나빠요. 이모한테 말할 까봐."

"뭐가, 오 오해라구. 이모부는, 이모부는 말이야 옛날에 너라면 깜빡 죽었잖니"

"지금은요?"

"무 물론, 지 지금도지 그렇겠지 뭐. 경우에 따라선..."

"그래요? 절대 비밀인데요, 그럼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그래 비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줘야겠지."

"당연히 들어주실 수 있는 거지요. 약속해요, 빨랑!!!"

"흐... 혀 혀 협박은 아니지? 할 수 없지 뭐, 약속하지. 아주 쉬운 걸로 하자."

"저기요, 아주 쉬운 건데요, 저 친구들이랑 담임선생님 댁에 갔다가 스케이트장 가기로 했는데 돈이 좀 부족하거덩요. 엄마가 너무 쬐끔 줬어요. 이십만 원만 주실래요?"

"흐잌, 이십만 원? 이만 원 아니구?"

"장난해요, 지금? 이십만 원요. 저 지금 중학생이라고요. 좋아요 그럼 십만 원만 줘요."

"응 중학생, 그 그러지 뭐... "

"호호호호호호, 고마워요 이몹붕 ~ ... 쫌 있다 봐용, 안뇽~" 


엉겁결에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하니 참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그날 저녁, 피 같은 용돈 십만 원을 빼앗기고는 아무에게도 말 못 한 채, 태어나 처음으로 섣달 그믐날 벙어리 냉가슴 앓듯 꼬빡 날밤을 새우고 말았습니다. 뭔가는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도통...

하지만 메일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다는 현실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하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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