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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섭 Feb 29. 2024

< 어머님의 달력 >

< 어머님의 달력 >




누구나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 다 마찬가지 소망이며, 부모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실 때 그 가정도 화목하다. 그것도 즐거우신 마음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신다면 얼마나 좋을 까?

우리 아버님께서는 만 60세가 되던 해에 다니시던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시면서 갑자기 심장질환과 고혈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셨으나 노인대학을 다니고 봉사활동을 시작하시면서 건강을 회복하셨다. 그 후 나중에 그 봉사활동 마져 그만 두신 후로는 또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68세가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이와 같이 노인들께서 나이를 느끼며 할 일을 잃을 때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위험에 처하게 되며, 반대로 나이를 잊고 할 일이 있다고 느낄 때 건강한 것은 마음이 병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신 아버님과 달리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계신 것은 아마도 나이를 따지는 정년이 없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금년 91세 되신 우리 어머님은 경기도 송탄의 어느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사시는데 셋째 형님께서 집을 사 주셔서 혼자 기거하고 계시다. 체격은 무척 마르셨으나 아직도 정정하시며, 고전 읽기를 무척 좋아하시는데 잡일을 모두 보시면서도 장화홍련전쯤은 불과 며칠 내로 다 읽으신다.

하시는 일은 보통 마당에서 간단한 야채를 가꾸시거나 동네 할머니들이 오시면 함께 대화를 나누시면서 밥을 지어 드시는 것이 대부분인데 마을회관이 있음에도 이 곳에 할머니들이 모이시는 이유는 우리 어머님께서 할머님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빨래며 집안 청소까지 서로 분담하여 함께 처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재미있으시다는 것이다. 역시 노인들도 소일거리가 있어야 적당히 운동도 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나 보다.

그런데 그 곳은 가구 등 모든 살림살이가 여느 집이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다른 것이 딱 하나가 있다. 다름 아닌 달력인데, 그 곳엔 년도가 지워져 있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어머님 연세가 89세였던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 해 명절에 식구들이 모두 모였을 때 누군가가 어머님께 나이를 물었다. 당연히 어머님은 89세라고 말씀하셨고, 그 후 1년 후에 다시 모였을 당시 내가 다시 물었지만 이 때에도 어머님은 또다시 89세라고 대답하셨다.

물론 표정을 보거나 어머님의 건강상태를 보거나 스스로 나이를 충분히 기억하실 만 하지만 일부러 그러시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어머님은 90세를 넘기시기가 싫으신 것이 분명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꽤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과 세상 모든 동물들 중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이를 숫자로 기억하며 세는 것은 인간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 둘 씩 해가 바뀌면서 그 때마다 무척 서글퍼 진다.

어머님은 정신적으로 70세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도 나이를 세면 마음의 상처가 깊어질 것은 분명하다. 연세가 높으신 노인이 도대체 나이를 따져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00세를 넘겼다고 칭송받으며 서글퍼지는 것보다는 90세라며 아무런 칭송 없이 건강하고 즐거우시면 그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후 우리 어머님이 기거하시는 집에는 자식들의 생일 등 무슨 때를 기억하셔야 하기 때문에 달력을 갔다 드리긴 하지만 이 때 아예 년도를 지워 버리고 걸어 놓는다.

금년 초 달력을 걸어 드리면서 나는 물었다.


"금년 89세 맞지요?"

"그려, 네 나이나 잘 기억 해여..."


노인이 기거하시는 집안의 달력에 연도를 지워 버리고 걸어 놓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참 멋진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우리 모두 노인 방의 달력에는 연도를 지워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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