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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Apr 17. 2024

빛을 그리겠다며 그림자만 보고 있을 때

일상드로잉

같은 부서에 있는 학폭 담당교사 한 분이 요새 자주 아프다.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등교지도를 하다 보니 몸이 축난 것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같은 일을 하는 나 역시 집에 가면 삭신이 쑤셨다.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걸 보니 믿을 건 달리기로 챙기고 있는 체력뿐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문은 차량 통행이 잦은 교차로에 있다. 요즘 내 하루 업무의 시작은 등교하는 아이들과 차들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교문 앞을 지키는 일이다. 오랜만에 학생안전부에 들어와 몸으로 뛰는 일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어색한 일투성이다. 특히 생활지도 부분이 그런 편인데, 복장 불량을 잡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아침마다 옆 학교와 우리 학교 아이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 참 다양한 방식으로 개성을 표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부쩍 늘어난 장발의 남학생들이다. 뒷모습만 보면 여학생으로 착각할 만큼 머리가 길다. 가만히만 있어도 죽을 것 같은 이 지독한 사춘기는 어떻게든 자기를 표현하게 만든다. 비싼 브랜드의 옷과 신발들, 파마와 염색한 머리, 세상과 소통을 거부하겠다는 듯 커다란 헤드폰, 래퍼처럼 얼굴을 반 이상 가린 후드와 목걸이.


학교엔 용의 복장 규정이란 것이 존재하다 보니 교사는 학생들이 교복을 잘 입도록 지도해야 한다. 하지만 나도 이 나이 때는 교복 입는 것이 싫었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학생부 선생님에게 걸리면 혼나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까지 길렀으니 왜 모르겠는가. 돌이켜보니 반항심이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답답했던 시대상을 반영하듯 서태지는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다 외쳤지만, 나는 그저 촌스러운 교복과 짧은 머리가 창피했을 뿐이다.       


그랬던 내가 이젠 역할이 바뀌어 아이들 복장 지도를 하고 있다. 썩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적임자라는 생각도 든다. 오늘도 조폭 차림으로 등교하는 한 아이를 붙잡고 잔소리했다. 엄하게 말했지만 웃으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을 보니 이 녀석은 내일도 자기 마음대로 옷을 입을 것 같다.   


왁자지껄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지나가고 잠시 등굣길이 조용해진 틈을 타 주변의 나무들을 바라봤다. 3월까지만 해도 날이 꽤 추워 나무들은 앙상했다. 그런데 어느새 나무들은 푸른 잎사귀를 두르고 있었다. 빛이 통과되어 투명하게 그 속을 드러내는 잎들엔 눈이 다 부셨다. 둔감해진 건지 매일 보는 풍경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면 내 역할에 너무 몰입해 아이들만 쳐다봤는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 초반, 스탠퍼드 대학에서 행해진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다. 평범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룹을 나눠 교도관과 죄수로 역할을 분배한 후, 지하 실험실(감옥)에 가두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실험이었다. 참가자들은 역할에 대한 그 어떤 지시도 받지 않았고 상황에 놓인 것이 전부였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처음엔 장난스럽던 그들의 행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역할에 매몰돼 실제 교도관과 죄수처럼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두 달간 칭찬을 위한 자리가 아닌 단속을 위한 자리에서 아이들을 바라봤다. 예전이라면 귀엽게 봐줄 수 있는 것들도 지적의 대상이 되곤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빛을 그리려 했지만 그림자만 묘사하고 있었다.


하루를 살펴보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놓칠 때가 있다. 직업에 빠져 경험에만 의존하니 현상 이면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아까 잔소리했던 녀석은 겉모습과는 달리 귀여운 구석이 많다. 자신의 덩치가 남들보다 월등히 크기에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가는 중일 수도 있다. 매일 듣는 변명인 교복이 안 맞는다는 말도 반쯤은 사실일 것이다.


중학교에서 3년이란 짧은 기간에도 아이들은 여러 번의 계절을 겪는다. 내면에서 꽃이 피고 지고 앙상해졌다가도, 다시 기둥을 넓혀 이를 반복한다. 포기하고 싶던 말썽쟁이들도 어느 순간 훌쩍 커버린 모습을 보여줄 때면 내 안 어딘가에 있는 편협함을 탓하게 된다.


과거와 지금 내 시선의 거리가 멀게 느껴질 때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타성에 젖어 나 홀로 괜찮은 사람이라 믿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꼰대라는 소리는 면해야 할 것 아닌가.         



네발자전거 같은 균형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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