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감기약 때문인지 조금은 몽롱한 아침, 같은 교무실을 쓰는 한 교사의 화난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자신의 기분이 몹시 상했음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있었다. 다들 고개 숙이고 일하는 척 하지만, 귀는 소음의 발원지로 가 있는 것이 보인다. 긴 통화 끝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동작은 애써 태연했고 소리는 거칠었다.
맥락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공기를 찔러대는 짧은 몇 마디로 분노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상대에게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여기며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어쩔 것인가.
누구나 화를 낸다. 당연한 일이다. 불편한 감정은 가둬두는 것보다 적당한 표출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해석의 차이가 생긴다. 우리는 적당함을 모른다. 고추도 고추장에 찍어 먹어야 하는 한민족은 늘 화가 많다.
그는 전화를 끊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불만을 표시하며 자신이 화가 났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곁에 있는 누군가 왜 그런 건지 물어보고 맞장구로 분노 진화 작업을 해줘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은 곁에 없었다. 경험으로 그의 성향을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여나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시선을 피하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화 anger를 한자로 쓰면 불火이다. 큰 불은 가까이 있는 것들을 태워버린다는 속성 때문에 사람들을 두렵고 멀리하게 만든다. 또한 불은 쉽게 번진다. 어째 불 대신 성난 사람을 대입해 봐도 비슷하지 않은가. 자기 자신을 전부 태워버려야 꺼진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는 것은 잿더미뿐이다.
내 지난 부끄러움 한 귀퉁이엔 화 anger가 들어앉아 있다. 돌아보니 20대 초반까지는 화가 참 많았다. 특히 무례한 사람들과 폭력적인 사람들에겐 격렬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때는 분노가 나를 사람들과 멀어지게 만드는지 몰랐다. 그런 방식의 해결 밖에 몰랐던 나 역시 누군가에겐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존중을 받으려는 자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십여 년 전 가수 임재범이 예능 방송에 출연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는 방송가에서 무수한 소문이 돌던 은둔 기인이었기에 그의 출연 결심은 놀라웠다. 가슴 아픈 가정사와 영웅담처럼 퍼진 그의 폭력성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지만, 방송에서 보인 날 것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의도적인 편집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쉽게 흥분하고 주변인에게 폭력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밝힐 수 없는 이유로 그는 방송에서 중도 하차하게 되었고 대중은 그런 그의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훗날 그는 한 방송에서 아내와 사별 후 지난 일들에 대해 말했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실망했으며 화가 많았던 당시에 대해 진지하게 사과했다. 중간중간 주변인들을 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은 뛰어난 예술가가 돌아온 것을 환영했고, 그는 그 후 적지 않은 방송에 출연했다. 임재범이 변할 수 있던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그는 아내의 헌신에 늘 미안했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자신을 향한 대중의 사랑을 알고 있었다. 결국엔 상처 입었던 야수를 성찰하게 만든 것은 애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늘 주변을 살피며 살아야 한다. 자연인처럼 홀로 살 것이 아니라면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어디서든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과 다른 존재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우리는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선 상대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필요하다. 이 사소한 것들이 쌓이면 애정이란 것이 된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애정을 보여주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배려와 경청이면 충분하다. 그 어떤 관계에서든 자신이 상대에게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불필요한 충돌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물론 세상이 그리 말랑하고 쉽게 일반화되지는 않는다. 서로가 이해하지 못할 때는 서로 다른 대로 내버려 두고 살면 된다. 이 역시 존중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긴 잡설은 화가 많은 그대를 위한 것이었다. 누가 애정을 원치 않겠는가. 외로워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상처로 세상을 등질지라도,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애정뿐이다.
선반 위에 놓인 주병酒甁이 보인다. 집과 일터에는 내가 만든 다기들과 주병들이 진열 돼 있어 마음이 소란할 때 가만히 쳐다보곤 한다. 대부분의 기물들은 주로 물레를 차서 만들었는데, 물레의 원리와 흙의 속성이 오늘 이야기의 마무리로 제법 어울려 보인다.
1. 물레 원판의 한가운데 원기둥 형태의 흙을 붙인다.
2. 원기둥 형태로 판매되는 청자토는 겉으로는 매끈해 보이지만,속의 흙 입자는 무질서하다.
3. 이 상태로 기물을 만들면 흙이 말을 안 들어 형태가 쉽게 어그러진다.
4. 흙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회전을 이용해 가운데로 몰며 흙입자들이 질서를 찾을 때까지 흙의 덩어리를 내렸다 올리기를 반복한다.
5. 흙이 물레의 회전 시 흙과 손이 만나며 일어나는 마찰력을 줄이기 위해 적당량의 물을 묻혀야 한다.
6. 흙이 부드러워지면 어떤 그물을 만들고 싶건 속이 빈 원통의 형태를 만들고 그다음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