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두 달 동안 세 번째 듣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굳은 표정으로 지내는지 동료들이 한 번씩 물어본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화나 보인다는 얘기도 가끔 듣는 나인지라입가엔 미소라도 띄려 노력하는데, 요즘 그게 잘 안 됐나 보다.
꽤나 한가하고 평화롭다. 내 글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이 그렇다. 평소에도 수정을 위해 시간 간격을 두고 읽어보지만 오늘은 무언가 다르게 읽힌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내 일상과 생각의 어두움이 전혀 보이질 않고 글로 묘사되는 내가 낯설기까지 하다.
짜증스럽다. 갑자기 평소 쓰던 글의 방향을 바꿔 내심 꼴 보기 싫던 주변인들과 부조리한 모든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남의 가슴에 대못 박기라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 텐데. 이 기분이라면 한도 끝도 없이 비뚤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뭐가 어려울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사실을 말하고 부정적 예측을 더하면 된다. 오직 부정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요즘 일터에서 느끼는 감정의 그늘이 내 표정까지 드리웠나 보다. 피곤하게 이어지는 생각도 멈출 겸 어느 작가의 글을 읽었다. 유려한 글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글의 요건을 설명했다. 그중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솔직함과 날이 선 비판 정신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요건에 내 글은 부합되지 않았다. 나는 비판 정신이 부족했고, 한 개인의 한갓진 일상들만 기록하고 있었다. 더하여 일부가 전체인 것처럼 현실을 포장했으니기만적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내 고통에 충실해야 할까.
모두가 떠날 날짜만 손꼽으며, 존경은 사라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아이들은 늘 천사 같지는 않으며 부모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육아. 다친 어깨조차 꾸준히 치료하기 힘든 빡빡한 일상. 주변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
한숨이 나온다. 나는 세상을 마냥 밝게만보는 사람이 아니다. 조용한 교무실이 싫은 건지 자리 건너에 있는 여교사가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할 거 많은 것 같아서 부러워요. 저는 그냥 교사 그만두고 미용 배우고 싶어요. 그거 하고 살면 행복할 텐데...."
"그런가... 그럼 저부터 그만두고 어떤지 알려드릴까요?"
말은 그리 했지만 서로가 알고 있듯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방송에선 일반인과 유명인 모두 고통을 말한다. 무지한 우리는 전문가의 해결책에 열광하고, 유튜브로 먹고 마시는 방송을 보며 일상의 고단함을 잊는다. 하루하루를 그저 지우며 사는 것이다. '모두가 비슷하게 사는데 내가 뭐라고....'라며 말이다.
부정은 삶을 망치는 쉬운 방법이니 잊거나 외면하는 것도 좋은 방어기제라 볼 수 있다. 자아가 늘 올바른 신호만 보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잊는 것이 힘든 나는 외면도 잘 못한다. 그저 꾸역꾸역 현실을 살아간다.출간한 졸저 <일상으로의 초대전>에서 '삶이란 슬픔과 기쁨의 평균값을 맞춰가는 일'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어떻게 고苦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얼마 안 되는 기쁨으로 평균을 맞출 수 있을까.
돌이켜 보면 내 행복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스쳐가는 순간도 소중히 여겼을 때, 그 알아차림을 음미하며 현재를 살 수 있었을 때가 행복했다. 그러나 생업의 고단함에 빠져 스스로 정한 삶의 원칙을 잊을 때도 있었다. 그러니 요즘 내 표정이 그리 어두웠던 것이다.
한밤중 다시 자판을 누르며 기억에서 휘발되기 쉬운 순간들을 글로 남긴다. 일상을 복기하며 고여있던 감정의 농도를 맛본다. 이름 없던 장면엔 제목이 붙여진다.감정이 덧칠돼 모호했던 순간은 본래의 색상을 드러내며 내 어두운 밤을 밝힌다.
한 소설가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개소리를 하는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존의 고달픔을 말했을 것이다. 진실로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말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글 쓰며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 지금의 나를 구하는 것은 이 안에 있다. 나는 계속 한가하게 희망을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