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한 제자가 찾아왔다. 녀석은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생 시절에도 매년 찾아와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미술이 좋았던 건지 내가 좋았던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덩치에 안 맞게 늘 살가웠다. 이번엔 군입대 후 정기 휴가라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하루 한 시간이 아쉬운 휴가 때 굳이 학교에 찾아오는 녀석이 신기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녀석은 학교로 찾아와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미술을 하고 싶은데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고민이었다. 공부에는 관심 없어도 감각적인 아이들이 미술을 선택하려 들 때가 있다. 미대생을 떠올리면 폼나보이니 대충 쉬워 보이는 길로 가려는 것이다. 실상은 성적과 실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며, 높은 경쟁률에 장수생이 넘친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모른다. 보통 이 사실을 설명해 주면 절반 이상은 성급했던 선택만큼이나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녀석은 진중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학교와 학과를 알아보며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생각이 굳어 보여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았으나, 넌지시 취미는 취미로 남겨두는 것도 좋다는 말을 해줬다. 기대와는 달리 좋아하던 일이 생업이 되면 괴로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던 학교의 사진학과로 진학했다. 어떻게 예술이 아이 가슴에 스며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또 한 명의 예비 작가 탄생에 진심을 담아 축하해 줬다.
오랜만에 마주한 녀석은 군대가 체질인지 커진 덩치만큼이나 제법 의젓했다. 근황을 물어보자 쉬는 시간엔 책을 읽고 작업 노트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평소 자신이 촬영한 사진들을 보여주며 작업의도를 설명하는 녀석의 표정엔 칭찬에 대한 기대와 쑥스러움이 함께 했다. 문득 내 지난 대학시절의 모습들이 보였다. 그 시절의 나도 이랬겠지만 이 아이처럼 귀엽진 않았다.
자신의 이해보다 높은 수준의 용어를 사용하고, 현역 작가 못지않은 진지한 고민을 듣다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검게 그을린 녀석의 얼굴은 환히 빛났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그 빛의 정체는 열정이었다. 시작하는 예술가만이 뿜어낼 수 있는 순수한 열정.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 지난 경험을 나누고 작업을 격려했다. 지도교수 험담엔 맞장구를 쳐주고, 아직 녀석이 이해할 수 없는 수업은 그 의미를 알려줬다. 내게 시선을 떼지 않고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는 모습이 대견했다. 나를 크게 보는 듯한 녀석에게 말했다. 나는 작업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너에겐 좋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으니 열심히 하라는 응원으로 이번 만남을 마무리했다.
대학생 시절, 군입대 전까진 전공 교수님의 과제 크리틱에 대비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아이디어만 그럴싸했고 수업엔 성실하지 못했던 나는, 그 간극을 말로 때우려니 고달팠다. 교수님들은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헛바람이 가득 찼던 나는 외려 술자리에서 예술을 퍼마시고 작업으로 해장한다 여겼다.
그런 와중에도 유독 내 작업을 칭찬해 주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너는 작업 아이디어가 좋고 어떻게든 눈에 띄는 마무리를 해서 기대된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이분을 떠올리면 내 졸업 전시날이 기억난다. 오픈 당일의 나는 전날의 작품 설치로 긴장과 피곤이 쌓여있었다. 괜히 3미터나 되는 커다란 작품을 만들어 이동 및 설치에 진을 뺐던 것이다. 다행히 파손 없이 무사히 설치를 마쳤지만, 예민해진 나는 오픈이고 뭐고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졸업생들 사이에서 멀뚱히 서있는데 저 멀리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시는 교수님이 보였다. 교수님은 전시 도록을 크게 펼친 채 내게 걸어오셨다. 다가올수록 내 작업소개페이지를 펼치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의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내 얼굴에선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해주셨던 그분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시작하는 예술가를 위한 진심 어린 응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