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의 해체 후 발표한 최성원 1집엔 <제주도의 푸른 밤>이 있다. 밴드의 영광을 뒤로한 채 우연히 찾아간 제주에서 그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명곡을 탄생시켰다. 잠시 노래를 재생해 본다. 파도소리로 시작되는 낭만, 욕심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가사, 그리고 마음을 보듬는 잔잔한 목소리. 여운이 유독 긴 이 노래는 지금도 꾸준히 리메이크되며 다양한 세대의 감성을 아우른다. 그의 노래엔 사람들이 제주에 바라는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그런데 제주도엔 정말 이 노래 같은 낭만이 있을까? 제주도는 다녀온 사람마다 평이 들쑥날쑥하다. 이는 계절에 따른 감상 차이도 있지만, 최근 가파르게 올라간 제주 물가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들 한 번쯤 주변에서 '그 돈이면 해외여행 다녀오지 뭐 하러 제주로 가'라는 말 들어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국내 여행은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 외침인지 자신의 경험에 비춰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국내에도 못 가본 곳 투성이 아니던가. 물론 제주는 많은 사람들이 한두 번 이상은 가본 유명 여행지라 피서철이라면 해외로 눈 돌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제주의 매력은 짧은 몇 번의 여행으로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곳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는 이번 여행으로 다섯 번째 제주 방문을 하게 되었다. 이 애매한 횟수엔 내 학창 시절 수학여행과, 교사로서 학생들을 데리고 간 수학여행도 포함되어 있으니 제주를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직까지 갈 때마다 위치도 헷갈리는 내게 제주는 여전히 신비한 섬이며 익숙한 듯 낯설다.
방학을 맞이한 내게 갑자기 3박 4일이라는 시간이 허락됐다. 이는 작년 경주 여행을 함께 했던 세 친구들이 다시금 여행할 기회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하지만지극히 내게 맞춰진 일정이라 조율할 시간이 부족해 멤버를 다 모으질 못했다. 아쉽게도 친구 하나는 이미 백두산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후였다. 다행히 내 일정을 맞춰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 둘이서 제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전 여행과는 다르게 이번 여행의 계획을 내가 세웠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장소에만 관여했던 것이 미안해서였다. 전에 좋았던 체험들은 살리고 새롭게 경험할 거리들을 다양하게 넣어 보았다. 내가 짠 일정을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지도에 빼곡히 써놓은 계획을 보여주자 그들은 너털웃음과 함께 혀를 찼다. 너답다는 말로 내 일정의 감상을 마무리했지만, '저 녀석은 여행에서도 늘 쉴틈이 없다.'는 농담을 이어가며 그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홀로 계획을 세우며 지난 제주도 여행과 달라진 점들이 신경 쓰였다. 우선 숙소 문제가 있었다. 지난 여행까지 제주에선 꾸준히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하루 정도는 게스트 하우스에 머무르며 파티에 참여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나이 제한이 있었다. 나는 클럽 입구에서 쫓겨나듯 예약 단계에서 정중한 거절을 당했다. 아, 이런.
나처럼 낯선 사람들이 불편한 내향인도 여행지에선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 지난 여행에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 한잔 기울였던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특히 한 방송국 PD와 이별 후 군입대를 앞둔 대학생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좋았다. 하지만 내가 유부남이 되어 애들을 키우던 사이 많은 것들이 바뀐 것 같았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의 게스트 하우스는 파티를 주력으로 한다는 예길 얼핏 들은 적 있지만 제주도까지 그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대의가 선남선녀의 만남에 있다면 우린 물러나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아니더라도 어쩔 것인가. 왜인지 게스트 하우스보다 가격이 저렴한 호텔들을 예약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웃다가도 불현듯 자신의 나이를 깨닫곤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여행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실은 날은 그리 밝지 않았고 김포의 날씨는 흐렸으며, 회색 구름은 무거워 보여 언제든 머금던 비를 쏟아낼 것 같았다. 우린 김포공항까지 대리 주차 서비스를 이용했다. 나는 친구를 통해 이 서비스를 처음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공항에서 차를 인계받는 사람이 여행 기간 동안 차를 다른 곳에 보관하다 도착 당일 공항까지 차를 가져오는 서비스였다. 생각보다 가격도 저렴해 유용해 보였다.
지난 여행에서도 언급했지만(전작 우린 경주하듯이 참고) 우리의 여행은 늘 순탄치 않았다. 오죽하면 여행마다 이어지는 잦은 고생과 해프닝은 전부 보이지 않는 큰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을까. 예컨대 고행만이 우리 죄를 정화시킬 수 있다는 여행의 신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라는 시답잖은 농담 같은 거 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던가. 아니면 우리가 지나친 낙관론자였을까. 공항에 도착한 우린 시선 밖으로 멀어지는 비행기들을 보며 아무것도 예감하질 못했다. 그저 친구 연인이 싸준 샌드위치 맛에 감탄하며 먹기 바빴고, 그것이 마지막 끼니가 될 뻔한 것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