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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Sep 25. 2024

한라산 반지원정대

미술교사의 제주도 여행 에세이 5 

올레 시장은 이중섭 거리 근처에 있었다. 무더위에도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랍스터 구이를 들고 인증 사진을 찍는 여성들이 보였다. 예전과는 달리 다채로운 먹거리를 판매하는 젊은 사장들이 많았다. 눈길을 사로잡는 베이컨 김치말이, 타코야끼, 선술집 등 맛집 앞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은 시장을 즐기고 있었다. 젊은 세대에게 시장은 힙한 곳이 됐다.


우린 가게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으며 마농 치킨집을 찾아다녔다. 발음이 제법 귀여운 '마농'은 제주 방언으로 마늘을 뜻한다. 이전 제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음식이 마농 치킨이었다. 더위에 치진 우린 시원한 이어컨과 목이 시릴 차가운 맥주가 간절했기에 식사 장소로는 치킨집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올레 시장에 그런 가게는 없었다. 시장 인근에서도 찾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눈에 띄지 않던 펍을 찾았다. 낡은 계단을 통해 2층까지 올라가자 가게가 보였다. 유리로 내부를 보니 손님은 없었다.


기대 없이 문을 열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에어컨 바람이 얼음물을 끼얹듯 머리 위로 쏟아졌다. 사장님은 전기세 걱정이 없는지 냉동도 가능한 온도로 매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음식을 맛보기도 전 가게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넓은 곳에 자리를 잡곤 레드락 두 잔을 시켰다. 땀에 흠뻑 젖었던 셔츠는 빠르게 말랐고 잔을 비울수록 길었던 하루는 끝을 향해갔다. 운 좋게 맥주와 치킨 맛이 좋은 가게를 전세 던 우리는 다음 날 일정을 위해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새벽부터 한라산을 등반하려면 쉬어야 했다.




남자들의 군부심은 유명하다. 학벌보다 출신 군부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도 많다. 그 결정판이 근래 방영했던 '강철부대' 였으니 군부심이 이해가지 않는 사람들도 방송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나와 친구는 대학생 시절 한 달 간격으로 입대했고 이웃 부대에서 복무했다. 강원도 양구와 인제에 있어 악명 높은 백두산 부대와 을지 부대였다. 박복한 둘은 *G.O.P 산꼭대기에서 젊은 날을 보냈으니 자부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G.O.P(general out post의 약자로 일반 전초를 뜻한다. 남방한계선, 즉 철책을 지키는 경계 부대.)


제주 여행을 계획하며 한라산 등반 가능 여부에 대해 친구와 이야길 나눴다. 언뜻 생각해도 3박 4일 짧은 여행기간 중 한라산 등반을 하려면 이틀의 시간은 할애해야 했다. 게다가 우린 자부심 넘치던 시절의 몸상태가 아니었으니 선뜻 생각나는 대로 결정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가기로 했다. 산을 싫어해도 이때가 아니면 한라산 등반을 못해볼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산악부대 출신이라는 자존심도 크게 작용했으니 말이 꺼내진 이상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알람을 맞추고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다. 최대한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전날 편의점에서 사둔 간편식과 물을 챙기고 호텔에서 나왔다. 한라산을 오르려면 탐방예약시스템을 통한 예약은 필수였다. 동네 뒷산처럼 아무렇게나 오를 수 없는 산이란 사실에 얕은 긴장감을 느꼈다. 더구나 백록담까지 오르기만 하면 인증서를 준다고 하니 마음만큼은 모르토르산을 오르는 반지원정대였다.  


하지만 호빗 같은 마음으로 관음사 코스보다 수월하다는 성판악 코스를 선택했다. 어찌 됐건 절대반지만 파괴하면 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우리의 목표는 무사한 완등이었으므로 편한 탐방길이 최선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성판악 주차장엔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보였다. 왕복으로 최소 8시간은 걸리다는데 아이들과 노인분도 보여 지난 망설임과 등산 전 준비했던 체력 단련이 우습게 느껴졌다. 내가 웃자 친구도 웃었다. 못난 녀석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더니 우리 얘기였다.


등산로에 매점이 없어 아침식사로 미리 준비해 둔 김밥과 우유를 먹었다. 화장실도 미리 다녀오고 스트레칭도 하며 요란을 떨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린 탐방로 입구에서 예약 확인을 받고 힘차게 첫 발을 내디뎠다.


해가 뜨면 잠들었던 산은 새들과 함께 깨어난다. 피아노 건반 누르듯 계단을 오르는 내 발걸음과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가 앙상블을 이뤘다. 한껏 감정이 고조된 나는 등산 스틱을 지휘봉 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산새 단원들은 목청껏 지저귀었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그러나 약 네 시간 후 우리의 연주가 오케스트라 행진곡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행진곡이 아니라 *레퀴엠이었다.


* 레퀴엠(Requiem) : 진혼곡




  


 

           


백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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