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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Sep 29. 2024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미술교사의 제주도 여행 에세이 6 

시시각각 변하는 한라산의 모습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길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그 빛은 잎사귀에 닿아 반짝인다. 마치 자연이 그린 그림처럼, 다양한 색조가 조화를 이루며 나를 초대한다. 한라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 같다. 바람이 불면 곳곳에서 수줍게 고갤 내민 설앵초가 작은 몸을 흔들며 웃는다. 멀리서 들리는 새들의 노래를 따라가면 어느새 삼나무 군락지로 들어선다. 길고 곧은 모습이 오랜 시간을 꼿꼿이 버틴듯해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서어나무 그늘에 기대 잠시 더위를 잊고 졸참나무 위로 뛰어다니는 청설모를 보며 생명의 순환을 생각한다. 커다란 숲 속 작디작은 인간은 이렇게 대자연과 연결된다.     





거짓말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한라산 등반 후엔 이 정도의 감상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는 산을 오르기 전 희망이었을 뿐, 현실은 달랐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성판악 코스에는 평지가 없었다. 끝이 안 보이는 오르막 길에 온 신경은 발 밑으로 가 있었다. 성판악 탐방로는 푹신한 멍석으로 시작됐다. 콧노래를 부르며 풍경을 감상했던 것도 잠시, 곧 울퉁불퉁한 현무암 길이 이어졌다. 이끼와 물기로 표면이 미끄러운 노면을 걷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잘한 부상과 수술로 망가진 다리가 신경 쓰여 걸음마다 불필요한 힘이 들어갔다. 당연히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뒤를 보니 친구의 상태도 다르지 않았다. 우린 말없이 눈앞의 경사를 오르는 일에 집중했다. 산악 행군처럼 길을 오르니 귓가엔 새소리가 아닌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이 정도면 많이 올라왔을 것이란 예측을 비웃듯 구간마다 보이는 거리 안내판은 안 그래도 무거운 두 다리를 한층 더 무겁게 만들었다. 트래킹화가 보호하지 못한 발목은 자주 꺾였다. 그나마 등산 스틱이 있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없었다면 부상을 당할 뻔한 순간도 많았다.


성판악 탐방로에서 쉬어가는 곳은 크게 속밭대피소, 사라오름, 진달래밭대피소로 나눌 수 있었다. 화장실도 갈 겸 휴식을 위해 모든 곳에 들렸다. 우린 번갈아 화장실만 다녀오고 오래 쉬지 않았다. 십분 이상 앉아 있으면 퍼져버릴 것 같은 부실한 다리를 신뢰할 수 없었다. 백록담이 가까워질수록 날씨는 변덕이 심해졌다. 작열통이 느껴지는 햇볕과 소나기의 불규칙한 반복은 안 그래도 동난 체력을 바닥까지 끌고 갔다.                   


진달래밭대피소는 정상에 오르기 전 마지막 쉼터였다. 여기서부터 한 시간 반은 걸린다는 말에 절망했지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린 다시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지막 쉼터를 지나치니 빠르게 출발했던 등산객 중 일부가 내려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꼭대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한 중년은 내달리듯 계단을 내려와 비실한 우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 부러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내려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정상을 찍고 하산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린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랐다. 점점 하늘이 흐려지더니 진눈깨비가 날렸다. 한여름에 내리는 진눈깨비. 체온을 유지하고자 입은 비닐 우비는 강풍에 날려 찢어지고, 친구의 안경은 뿌옇게 가려져 제구실을 못했다. 여름에 내리는 눈을 보는 것은 제대 이후 처음이었다. 흠뻑 젖은 몸을 떨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다리가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와있었다.





백록담은 해발고도 1947미터로 남한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의 정상에서 볼 수 있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의 일부로서 보호되고 있으며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정 화구호다. 흰 사슴이 이곳의 물을 마셨다는 전설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맑게 갠 하늘 아래 백록담을 보기 힘들어 선업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우린 새하얀 허공 속에 있었다. 진눈깨비는 잦아들었으나 바람이 강해 눈 뜨기 어려웠다. 하산객들을 보며 했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백록담은 보이질 않았다. 난간에 서서 주변을 바라봐도 구름 속에 있는 듯 시계視界는 10미터를 넘어가질 못했다. 전생에 쌓은 선업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백록담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평소 줄이 길어 사진을 찍으려면 대기시간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는 얘길 들었는데 줄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열 시 십오 분이었다. 정상까지 네 시간이 안 걸렸으니 빠른 편에 속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좀 더 기다리며 날이 개길 기다렸다. 점심식사로 준비한 에너지바와 땅콩이 발라진 크림빵을 먹었다. 피곤한 몸에 당분이 들어오니 짜릿한 전류가 느껴졌다. 코카콜라를 처음 마셔본 부시맨처럼 우린 감탄사를 연발했다. 분명 이 세상의 맛은 아니었다. 출발 전 컵라면을 챙겨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더워 죽겠는데 무슨 컵라면이냐며 면박을 줬던 것이 후회됐다. 아마 그 추위에 따뜻한 국물까지 마셨다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진눈깨비가 날렸다. 등산을 위해 가볍게 입은 기능성 운동복은 방한이 되질 않았다. 견디기 힘든 추위에 몸이 상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일정을 위해 우린 하산을 결정했다.





  

       

마지막 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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