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 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한라산국립공원 홈페이지로 사진을 전송했다. 한라산 등정인증서를 받으려면 사진을 등록해야만 인정이 됐다. 정상에서 내려오면서도 못내 아쉬웠다. 무슨 예감인지 한라산에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았다. 친구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앞으로 최소 십 년은 산을 타지 않겠다며 자조 섞인 중얼거림을 반복했다. 나 역시 비슷한 심정에 작별 인사하듯 눈으로 주변을 담았다. 하지만 싸구려 감성은 허용되지 않았다. 다시 내려치는 거센 비에 친구는 앞이 안 보인다며 아우성이었고, 나는 입 속으로 들어오는 비로 가글하기 바빴다.
이제 빈손으로 돌아갈 탐험대는 가시적 성과가 있어야만 했다. 탐방로를 오르며 여력이 부족해 그냥 지나쳤던 명소가 있었다. 진달래밭대피소를 지나치고도 한참을 더 내려가자 아침에 지나쳤던 그곳이 보였다. 사라오름이다. 해발 1,324미터 지점에 있는 사라오름은 분화구에 얕은 물이 고여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는 곳이다.
사라오름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기어가듯 겨우 내려왔기에 다시 어딜 올라갈 힘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린 충동적이었다. 재채기하듯 입 밖으로 나온 '올라가 볼까?' 한마디를 친구는 덥석 받았다. 발바닥 물집으로 환자처럼 걷던 친구와 젖은 옷에 사타구니가 쓸려 고통스럽던 나는 다시 계단을 밟았다.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십 분을 보낸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탁 트인 전망이 우릴 맞이했다. 투명하게 바닥을 보여주는 산정호수와 수면을 타고 흐르는 산들바람이 좋았다. 호숫가 근처 데크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도시 사람은 바닥에 누워 하늘 볼일이 없기에 이런 사소한 행동조차 감격스럽다. 하나둘 뒤늦게 도착한 등산객들도 우리 곁에 자리해 영원할 것 같던 고요가 깨졌다. 자리가 좁아지니 미련 없이 사라오름 전망대로 이동했다.
강한 바람에 감았던 눈을 뜨자 시야가 크게 열렸다. 시원시원하게 산과 하늘의 경계가 반으로 나뉘었다. 눈도 일상의 많은 정보가 피곤했는지이 위대한 단순함에 쉬어감을 느꼈다. 능선을 따라 휘몰아치는 바람에 나무들이 빗으로 빗어주듯 움직였다. 숲이 내는 소리는 또 얼마나 청량하던지. 이 짧은 경험만으로도 우리의 한라산 등반엔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위안할 수 있었다.
다시 산을 내려갔다. 커다란 구름의 무리도 산을 타고 내려갔다. 등을 밀어주는 바람이 고마웠지만 여전히 사타구니의 고통에 걸음이 힘겨웠다. 뒤를 보니 친구의 걸음도통증으로 현저하게 느려졌다. 경쾌하게 하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릴 지나쳐갔다. 힘들다며 투정 부리는 아이를 등에 업고 씩씩하게 내려오는 아버지도 있었다. 핑계 많은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어졌어도 우린 그저 계속 걸었다.
출구를 1km 앞에 둔 비실이들 곁으로 노루 한 마리가 다가왔다. 사람을 봤는데 도망가지도 않고 곁을 맴돌았다. 적당한 거릴 두고 한가로이 거니는 모습이 마치 우릴 배웅하러 나온 것만 같았다. 이 작고 고운 노루는 분명 한라산의 정령이었을 것이다. 그 격려 같은 인사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마지막까지 한라산의 배려를 받았으니 우린 충분히 운이 좋았다.
'고생했어, 잘 가.'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은 곧 허기짐으로 이어졌다. 등산을 마친 우린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백록담에서 먹지 못했던 라면이 생각나 한 해물 라면집을 찾았다. 해물과 라면을 삼키며 지친 몸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스포츠 마사지도 고려했으나 살짝만 건드려도 아픈 몸의 상태는 지압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사우나에서 긴장된 몸을 풀어주는 것이 좋을 듯해 가게 사장님께 괜찮은 곳을 물어봤다.
"여기서 멀지 않은 산방산에 탄산 온천이 있는데 가보세요."
여전히 제주도엔 못 가본 곳이 많았다. 근처에 탄산 온천이 있다는 사실에 반색한 우린 서둘러 산방산 탄산온천으로 향했다. 예상보다 온천의 규모는 컸다. 대형 사우나 모습을 한 탄산온천엔 방문객들이 많았다. 벌써 사위가 어둑해진 주차장엔 차들이 가득해 가까스로 주차를 마치고 건물로 들어갔다. 외부 온천도 사용할 수 있는 입장권 두 장을 끊고 입장하니 또다시 계단이 보였다. 평소 계단 오르는 운동을 좋아한다는 말을 지인들에게 하곤 했는데 더 이상은 못할 것 같다. 좀비처럼 어기적대며 힘겹게 올라간 2층엔 넓은 사우나가 있었다.
탄산 온천을 처음 경험하는 나로서는 탕에서 풍기는 독특한 냄새가 첫인상이었다. 유황 또는 녹슨 쇠 비슷한 냄새는 영 불편했다. 다만 유황 온천같이 강한 냄새가 아니라 참아줄 만했다. 황토를 부은 듯 누런색의 물이 가득 찬 넓은 탕 속엔 노인분들이 많았다. 구석에 자릴 잡고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그자 작은 기포들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온몸에서 탄산의 가벼운 따끔거림이 느껴졌다. 물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자극에 몸이 회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외부로 나가자 가족과 연인 단위로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소릴 지르며 물장구치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빠가 되면 아이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내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장소가 늘어나는 것도 부모의 기쁨 아닐까. 짧은 시간을 구경하듯 보내곤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온몸을 괴롭히던 근육통은 많이 완화되었으나 피곤함이 밀려왔다. 차를 몰고 호텔 근처 식당을 찾았으나 너무 늦은 시간이라 마땅한 곳이 없었다. 편의점에서 간편 조리가 가능한 냉동식품과 맥주를 사서 호텔로 들어갔다.
자취 시절이 생각나는 조촐한 자리였다. 맥주 한 캔의 취기인지, 피로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이불 같은 무거운 잠이 쏟아졌다. 다음 날 들은 얘기지만, 친구는 내가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이 닦고 자리에 누웠다고 한다. 일 분도 안 되어 코를 골았다는데, 내게 그날 밤은 제주 밤바다를 닮은 검푸른색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꿈 없이 깊은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