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 거실 TV 앞엔 하르방이 있었다. 나름 귀여운 미니어처였다. 그 시절엔 여행이 귀해서인지 잡다한 기념품들이 집에 많았다. 얼핏 기억나는 건 88 올림픽 주 경기장 모양의 크리스털 재떨이, 대전 엑스포 꿈돌이 인형 같은 것들이 집에 놓여있던 모습이다.
특히 하르방 미니어처는 종종 내 장난감이 되곤 했는데, 거꾸로 손에 쥐곤 절구처럼 무언가를 찧다가 들키면 어머니께 혼이 났다. 하르방은 모자가 점차 마모되어 볼품없어질 때 즈음엔 온전히 내 장난감이 되었다. 악동 손에 들어간 하르방은 오랫동안 곤욕을 치렀다. 닳아버린 머리는 크레파스로 색칠이 되고 때로는 점토가 붙어 모양이 더 우스꽝스러워졌다.
어린 내게도 하르방 모자는 이상해 보였다. 갓이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전체적인 형태를 보면 훗날 생각해 봐도 억지스러웠다. 차라리 남자의 성기 같은 이 모양이 대체 왜 할아버지의 형상을 하고 있을까를 고민하는 일이 흥미로웠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돌 하르방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입구에 세워졌던 석상이다. 문헌 기록상 조선 영조 30년(1754)에 제주목사 김몽규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현재 총 45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의 성문이나 사찰 앞에 설치한 장승과 같이 수호신의 역할과 경계 금표적(禁標的)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설명이 만족스럽지 않다. 예전엔 여성들이 하르방의 코를 만지던 풍습이 있었다. 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남근석 기원에 따른 미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제주에서만 이런 형상의 석상을 볼 수 있을까.
여러 개의 가설을 구슬 꿰 듯 하나로 정리해 본다. 제주도는 바람, 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고 불렸다. 그중 여자가 많았다는 역사적 배경에 주목한다. 제주도는 환경이 척박했기에 남성들은 주로 외부로 나가서 어업에 종사하거나 군사적인 이유로 섬을 떠나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사망자도 많았기에 남성이 귀했다. 따라서 남아를 선호할 수밖에 없던 시대상이 담긴 토템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할아버지 형상의 남근석은 유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초기엔 남근석 모양이었던 토템을 유교의 수용 후 외곽 형태만 남기고 다시 조각을 했거나, 그 후 만들어졌다고 보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
차로 숙소까지 이동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숙소 근처에 있는 이중섭 거리와 올레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동선을 살펴보니 이중섭 거리가 더 가까워 지도를 보며 찾아갔다. 이중섭 거리가 어디부터 시작인지 알 수 없었다. 부산 어느 골목길이 연상되는 소로로 들어서자 군데군데 이중섭의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보였다. 그를 닮아 정겨운 그림들을 지나 낮은 돌담 너머로 초가집 지붕이 보였다. 이중섭 거주지였다.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여 1956년 9월 작고했다. 40세의 젊은 나이 영양실조와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불운했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세기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며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인의 얼이 담긴 소를 주로 그렸다. 때론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6 25 전쟁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일본으로 보냈으며 가족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이 담긴 그림들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내 어린 30대는 이중섭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술을 가르쳤으나 한국 근현대미술의 대가들에 대한 수업을 할 때면 학생들에게 감동을 전하기 어려웠다. 젊은 시절의 치기는 화려한 기교와 아이디어가 풍부한 동시대의 작업에 손을 들어줬고, 근현대미술엔 교과서적인 평가만 나열했을 뿐 큰 감흥이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어린 시절 비겁하게만 들렸던 그 말을 되뇌어 본다.
'너도 나이 들어봐라'
충분히 세월을 겪어보고 세상을 판단하라는 속 뜻을 우매했던 과거엔 알 수 없었다. 어느덧 생전의 그 보다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 이중섭의 생가에 왔다. 소박한 초가집 우측에 위치한 작은 부엌 같은 공간이 네 가족이 머물던 곳이다. 제주도에서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일 년도 채 안되게 지냈지만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한 평 남짓한 좀은 방 앞에서 그의 눈으로 주변을 본다. 삶은 늘 계획대로 이뤄지진 않았으며, 관계는 고통일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세상의 인정을 받는 날이 올 것이라 끝까지 믿을 수 있었을까. 방 안에 놓인 그의 사진을 보았다. 분명 이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보며 이 작은 방만큼의 행복이라도 영원히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찜통더위에 땀이 줄줄 흘러 옷을 적셨다. 더는 머물기 어려웠다. 아쉬운 마음에 잠시 마루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고 길을 나섰다. 이제는 내 삶에서 멀어져 버린 것만 같은 예술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중섭의 표현력과 작품 주제만을 사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생애를 통해 아픔에 공감하고, 고난과 역경에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던 의지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세상에 예술가는 넘친다. 그러나 사랑받는 예술가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