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이상한 사람들일까?
9살이 되던 해 1월에 둘째 아이가 수술을 하면서 가족 심리검사와 종합검사를 함께 진행했다.
검사결과는 정상범주였지만 행동반경이 크고 말의 톤이 세어 아직 8살, 9살 또래 아이들은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호와 불호가 나뉘었다. 우리 2호는 유머와 위트가 넘친다. 그 모습을 재밌어 해주는 또래들도 당연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또래들이 더 많았다.
또래 사이에서는 내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더구나 이제 9살 아이들이 뇌수술을 하고 그 자체로 불안정하여 불편하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이해하고 보듬어 줄 리 없다. 그래서 나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이에게 모든걸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내 모든 것을 아이를 케어하는데에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내 손길이 모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큰 아이의 성향은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다. 동생이 아프면서는 아무래도 엄마의 빈자리를 느꼈을 것이다. 큰 아이가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노력했지만 아이는 분명 외로웠을 것이다.
지역에서 진행하는 상담에 큰 아이를 함께 참여토록 했다.
표출하지 못한 감정과 우울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6학년 0반 담임선생님께.
안녕하세요. 6학년 0반 *준* 학생 엄마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직접 찾아 뵙고 전달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 보는 제 아이는 대체로 활발하여 정상적으로 보이나, 실은 아이가 많이 긴장하고 있는 상태이며 피곤할수록 과흥분 상태가 되고, 이런 점이 오히려 아이가 활발해 보이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아직 수술한 부분의 혈관이 충분히 자라지 않았으므로 원칙을 지키고 느리게 생활해야 합니다.
충분한 수면, 휴식, 물 섭취, 스트레스 피하기를 통해서 혈관이 잘 자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수분 보급은 허혈 예방이 되므로 생활에 익숙해질 때 까지는 수시로 수분 보급이 가능하도록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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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출결 사항에 대해서 꼭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겉모습은 매우 평범해 보여 꾀병이라는 시선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성적으로 뇌혈류 부족 상태에 있어 환자만이 겪는 힘든 증상들이 있습니다
결석은 가능한 안시키려고 하고 있으나 지각, 조퇴 문제에 대해 조금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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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지도하시느라 바쁘신 선생님께 제 아이를 특별히 주의해 주십사 당부 드리는 것이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부디 넓게 이해하여 주시고 준*이가 밝고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잘 보살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초등 1학년부터 6학년인 지금까지 매년 새 학기 첫날 담임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부터는 학교에 출입하기가 어려워 아이편에 편지 봉투를 전달드렸다.
학생보호요청사항과 담임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를 함께 동봉했다. 기타 과목 선생님, 보건선생님께 전달드려 줄 것도 함께 부탁드렸다.
수술 후 1년,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 나갔다. 점심시간마다 밥을 먹고 나와서 노는 아이를 지켜보았다.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을 지켜보러 나오기도 하셨기에 우리는 거의 매일 인사를 나누었다.
수술 후 1년, 체육시간이면 운동장 한켠에서 아이를 지켜보았다.
체육시간이 겹치는 다른 학년, 다른 반 아이들과 점심시간에 우루루 나와 뛰어노는 아이들은 “아줌마 누구에요?를 수십번 물어왔다.
”응~ 아줌마는 이 학교 다니는 학생의 엄마인데 아이를 보호해줘야 할 상황이라서 보러 왔어~“
처음에는 모든 상황이 낯설어 마냥 힘들고 슬펐다. 덤덤히 대답하는 나는 자꾸만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몇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알게 되었기에 더 이상 내게 ”아줌마 누구에요?“를 물어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동네 엄마들과 차를 마시다가도 학교 점심시간이 되면 빠져나와 운동장으로 향했다. 미세먼지로 인해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오지 못하게 되거나, 비가 오는날에는 나도 쉬는 날이었다. 솔직히 그렇게 쉬게 되는 날이 너무 좋았다.
잦은 조퇴와 지각 결석은 어린 아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두통과 미식거림으로 뿜어내듯 토를 하고 힘들게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씻은 듯 증상이 없어지기도 했고, 유독 힘들게 하루 종일 증상이 지속되기도 했다.
증상이 싹 없어져 놀이터에 나가서 놀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아이가 꾀병을 부린거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야 너 아까는 아파서 학교 안왔으면서 놀이터에서 놀고 있냐?”
아이는 똑 부러진 대답을 하지 못하고 민망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래서 대답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까는 많이 아팠고 푹 쉬고 나서 다 나아진거야. 그래서 놀 수 있어.”
정확한 대답을 했을뿐인데 아이는 자신감 있어보였다.
학교에 갔지만 갑자기 컨디션이 안좋아 지는 일도 많았다. 교실번호로 전화가 오면 나는 바로 긴장모드에 돌입했다. 짧은 거리지만 참고 간신히 집으로 와서 가방을 헐벗듯 떨구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구토하는 소리를 듣는 자체로 가슴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었다.
통증으로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는 아이가 어떻게든 잠들기를 바라며 같이 옆에 누워 있어 주는 것 말고는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약으로 해결 할 수 없기에 더욱 힘든 시간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잠에 들고 일어나면 다시 활발한 아들로 돌아왔다. 배가 고파 급히 냉장고를 뒤지고 먹을 것을 찾았다. 최대한 담백하게 먹을 것을 차려 주지만 배가 고픈 아이는 성에 차지 않았다. 폭식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일은 소용이 없었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반나절을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허겁지겁 먹고 있는 아이 곁에서 “천천히 천천히”를 무한반복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평범한 보통의 아이와 부모들에게도 아이의 행동을 지적받고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겪어내는 경험은 힘들고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수술 하고 아픈 아이가 그 증상으로 인해 행동을 지적받고 선생님과 또래 아이들, 아이들의 부모들의 지적을 받아내는 일은 1년, 2년, 3년이 지나도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고통이었다.
아이와 내가 맞닥드리고 극복해가는 일상에서 시간은 흘렀다. 문제 행동의 횟수와 정도가 줄어드는 시기가 왔다. 고학년으로 가면서부터 확연히 보여졌다. 수술 후 뇌가 안정되어져 갔을테고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복합적으로 나아졌으리라.
그러던 중 또 한번의 고비가 찾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