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56
‘종교(宗敎)’는 ‘일반적으로 절대자나 초자연적인 힘, 절대적인 진리, 즉 신적 존재를 숭배하고 추종하거나 그런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깨달음 등을 추구하는 등의 문화 체계’를 말한다. 宗(마루 종)은 집을 나타내는 宀(갓머리)와 제단의 모양을 본뜬 示(보일 시)가 합쳐진 한자로, 집 안에 제단이 있는 모습을 본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마련된 ‘사당’이나 ‘종묘’를 나타내는 글자에서 파생되어 ‘마루(어떤 사물의 첫째 또는 어떤 일의 기준)’를 뜻한다. 敎(가르칠 교)는 爻(사귈 효), 子(아들 자), 攵(칠 복) 자를 합하여 만들어진 글자로 ‘가르치다’, ‘교육’, ‘본받다’ 등의 뜻이다. 한자어 ‘宗敎’는 불교에서 유래했으며,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을 담은 표현이다.
종교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선사 시대 매장의식 등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조금씩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의 원시 형태인 신앙이나 믿음은 인류가 모르는 것을 설명하고 도덕규범을 정하기 위해 존재해 왔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던 시절에 번개, 화산 등의 인간이 대처하기 불가능한 자연 현상을 인류는 최초의 종교 형태라 여겨지는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형태로 이해했다.
세계 4대 주요 종교의 신도 수를 보면 2020년 기준으로 기독교 약 23억 명으로 31%, 이슬람 19억 명으로 25%, 힌두교 11억 명으로 15%, 불교 5억 명 으로 7% 정도이다. 우리나라는 유교, 도교, 불교 등 동아시아에서 유래된 종교를 근간으로 하지만, 지금은 기독교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인구 전체의 절반은 무종교다.
종교는 행복에 있어 여러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필수조건은 아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편안함을 제외하면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에서 행복감에 차이는 거의 없다. 다만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라고 가르치는 이타성에서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바가 크지만, 반대로 종교에 의한 갈등으로 발생하는 전쟁과 분쟁은 종교의 역기능이다.
원시 종교는 미래에 대한 불안, 즉 공포의 대상이었던 자연으로부터의 보호막 역할을 하기 위해 종교가 탄생하게 된 만큼, 이 불안을 달래 줄 종교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종교가 우리 인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지만, 인류 사회에서 종교가 없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종교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장기적으로 하나의 문화적 관습 형태 등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 종교는 모두 다신교이다. 나무도 신, 돌도 신, 태양도 신, 달도 신 등. 종교는 오로지 인간사회밖에 없다.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간과 다른 동물을 차별화하고, 어느 인간사회나 종교 형태의 문화는 존재한다. 종교를 계기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신은 인간에게 동물을 지배하고 도축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준 것이다.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데, 동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종교가 필요했다.
그 후 하나의 신만이 있다고 믿는 일신교가 등장하는데, 유일신 외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종교적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유대교가 탄압받은 이유는 유일신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교를 위한 직접적인 종교전쟁 외에도 열강의 식민지 침략 명분, 지배 체제 유지를 위한 종교와 권력의 결탁, 점령지에 종교적인 문제 발생 시 군대 파병(조선시대의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등 종교가 개입하지 않은 곳이 없다.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전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정복에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했다. 이에 따른 상상의 믿음을 기반으로 종교의 범위를 넓히면 ‘~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인본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이데올로기도 종교다. 민족주의에 의한 1․2차 세계대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량 학살인 히틀러의 유대인 600만 살해, 공산주의에 의한 전쟁 등 넒은 의미에서 종교(주의, 믿음)에 의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종교 교리는 포용, 사랑, 이해, 자비 등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종교만큼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도 없다. 심지어 같은 종교라도 종파에 따라 배타․배척한다. 종교든 이데올로기든 인간을 중시한다는 것은 같지만, 지향점에서 조그만 차이가 정치적으로는 큰 차이를 만든다. 이런 종교와 사상의 차이로 인해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고 1억 명 이상이 죽었다. 인류사에서 믿음이 다른 집단 간의 싸움은 처절하고 참혹했다. 지금도 재난과 질병보다 더 많은 생명이 종교의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다. 가지고 배운 자들이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세상, 종교적 구원에 다가간 자들이 세속적 부와 명예에 집착하는 세상의 변두리에선 아직도 많은 희생과 죽음을 강요당하고 있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니체나, ‘신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신을 만든 것이다.’라며 신을 의심한 리처드 도킨스가 아니더라도, 과학과 기술의 시대인 21세기에 종교는 권위를 잃어가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세계와 모든 생명체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적 신앙은 상상의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항상 신의 이름으로 고통스러운 ‘현세’와 구원받은 ‘내세’를 구분하고, 사회의 곳곳에는 죽음을 설교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니체는 ‘종교인은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다.’라고 말했겠는가. 이런 오명에서 벗어나 종교 본연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세상과 인류를 구원한다는 거대한 담론에 앞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종교의 폐단을 걷어내는 노력이 앞서야 할 것이다.
200년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종교와 반목하고 대척점에 서 있던 과학도 지금은 잘 공존하고 있지 않은가. 에드워드 윌슨도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두 축은 종교와 과학이다.’라고 말하며, 종교와 과학이 함께 화합해 나갈 때 밝은 미래가 나타날 것이라 강조했다. 종교의 번영은 다른 믿음을 배척하거나 배타하는 데서 오늘 것이 아니라, 서로의 믿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종교는 설명하면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차원에서 공존을 기대한다.
믿음에 힘은 막강하다. 무섭도록 강력한 믿음을 좋은 방향으로 잘 활용하면 깨끗하고 밝은 세상을 기대할 수 있다. 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고, 인간 정신 활동의 최대 구원이다. 세상에 그냥 되는 건 없다. 따라서 믿음도,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종교인이 어려움이 처했을 때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는 의연한 모습이야말로 아름답고 경건하다. ‘이런 어려움조차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다’하는 믿음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은 보면 종교의 선한 영향력에 감동적이다. 이게 종교의 핵심이 아닌가?
종교는 삶에 지친 사람들의 위로처이고, 힘없는 사람들의 의지처이다. 신앙과 종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 신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자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소중히 여길 때 신은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나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우문(愚問)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늘 곁에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라는 어느 종교학자의 말이 현답(賢答)이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와 죽음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종교가 죽음과 천국에 매몰되지 말고, 반목과 갈등의 믿음에서 벗어나 인류의 화합과 번영의 구원 투수로 나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