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58
우리말 ‘삶’은 ‘살고 있는 것. 또는 생명, 목숨 그 자체’를 말한다. 특히 사람의 삶을 ‘인생(人生)’이라 하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뿐이라는 의미로는 ‘일생(一生)’이란 말을 쓴다. 다른 동식물에 대하여는 삶, 일생 대신 ‘한살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삶의 시작이 출생이라면, 삶이 끝나는 것은 죽음이다. 이렇게 삶의 의미나 죽음에 대하여 가장 많이 성찰하고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죽음에 대한 통찰만큼 최선의 삶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일까, 몽테뉴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기를 공부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가 불멸의 생을 산다면, 혹은 영생을 얻는다면 죽음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다면 삶의 의미도 없어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삶이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없고 우리는 그저 무생물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 된다. 삶을 돌아보는 여유가 있어야 죽음에 대한 통찰도 가능한데, 삶에 쫓기다 보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삶에서 성공과 행복의 조건인 부와 명예,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들과 이별인 ‘죽음’은 무척 가슴 아픈 일이다. 행복을 누린 자는 그 행복을 놓고 가야 하니 슬플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평생 불행하게만 살다 생을 마감해야 하니 많이 슬플 것이다. 고생만 하다가 살만하니 죽는다 하지 않던가.
삶은 유한하다는 불변의 진리 앞에서 인간은 무력한 존재다. 비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살아가는 일은 서서히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먼저 사라지느냐,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가 먼저 사라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라짐과 헤어짐은 그리움을 낳는다. 이별을 결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로 애도하거나 마음속 은밀한 곳에 추억으로 소중하게 간직하기도 한다.
죽음은 혼자 떠나는 것.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죽음을 배우면 죽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달라진다. 죽음은 모든 걸 남겨두고 혼자 간다. 우리는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들에 너무 집착하며 살아간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훨씬 단순하고 가벼워진다. 삶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갈 수 있는 비법이 죽음에 대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인간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삶이고, 잠드는 것이 죽음이다. 이렇게 잠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보면 죽음은 잠을 완성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은 본래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잠과 같이 늘 함께하는 삶의 일부라는 말이다. 심장과 호흡의 두 가지 리듬이 정지되지 않았지만 느끼지 못하는 수면은, 두 가지 모두 정지된 죽음과의 차이는 다시 깨어나는 부활에 있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즐겁게 놀고, 깊게 사랑하고, 뜨겁게 연애하는 모든 순간마다 조금씩 죽는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그래서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젊은이는 죽음에 대해 사유할 시간이 없고, 나이 든 노인만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노인이 삶의 경륜과 지혜가 생기는 이유다.
자기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만큼 거부감을 주는 것도 없다. 다만 이보다 더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것도 없다. 이 거북하고 달갑지 않은 문제를 직시하여 통찰할 때 성숙한 삶을 찾을 수 있다. 삶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삶은 그저 조금 더 길기만 할 뿐 하루살이의 삶과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세포학적으로 보면 잘 죽어야 잘 사는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매일 수백만이 죽어가고 수백만이 생성된다. 우리 몸의 전체 세포가 바뀌는 기간이 7년 정도 걸린다니, 7년 전의 나는 완전히 바뀌어 지금은 나로 변신한 것이다. 인간만이 죽음을 안다고 하지만, 늘 망각한 채로 살아가다가, 삶에서 죽음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이 삶을 경건하게 뒤돌아보는 시간이 되고,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남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맞이하고 싶은 것이 모두의 희망이다. 아쉬움이나 애통함이 적은 죽음,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등.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면서 잘 준비해야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삶의 의미는 살고 사랑하고 죽을 자유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도덕과 법률의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수단으로 사용되면 그것은 훌륭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훌륭한 인생, 행복한 삶은 죽음 너머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삶은 ‘지금 여기’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따뜻한 봄이 오면 겨울 동안 움츠렸던 온 식물들은 기지개를 켜고 자태를 뽐낼 준비를 한다. 생명의 싹을 틔워 꽃은 피어나고, 그리고 진다. 지는 꽃을 보고 덧없다고 하지 마라. 피었으면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지는 꽃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씨가 달린다. 낙화가 없다면 열매도, 씨도, 다음 해의 꽃도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삶과 사랑이 있어야 새 생명이 탄생하고, 성숙과 소멸이 있어야 그 자리를 채운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도, 누군가 먼저 살다 양보해준 자리다. 부모가, 그 부모의 부모가, 그 부모의 부모가~! 그래서 삶은 죽음이다.
이렇게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리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꽃처럼 아름답게 살다가 꽃처럼 죽기는커녕 죽기 힘들고 현재를 더 붙잡으려는 부질없는 욕심에 추한 꼴만 보이곤 한다. 하긴 자연스럽지 못하니 인간인 게다. 그래서 자연을 인간의 영원한 스승으로 삼으라 않던가.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길에 서 있을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다.’ 스탠퍼드 졸업식에서 스티브 잡스의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말로 마무리~! ‘너는 흙에서 난 놈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넌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죽지 않을 것처럼 살지 말라.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일 죽을 것처럼 사랑하고 살아가시기를~!
Who am I~? How to live~? Memento mori~!
https://brunch.co.kr/@dd05cb7dd85a42c/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