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59
‘노년(老年)’은 인생의 최종 단계로, 중년 다음으로 오는 단계다.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을 나타내는 순우리말인 ‘늙은이’는 좀 부정적인 표현의 느낌이 있으나 ‘노인’은 그렇지 않다. 젊은 사람을 나타내는 순우리말 ‘젊은이’는 부정적인 느낌이 없는데 반해, 노인이건 늙은이건 당사자들이 ‘늙은이’란 말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 부정적인 느낌도 따라온다. 법률적으로 나이에 따른 명확한 노인의 기준은 없고, 복지 정책마다 노인 나이 기준을 다르게 적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65세 이상을 노년, 노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늙어가는 노년을 매우 불안하고 걱정스럽게 생각한다. 몸은 허약해져 활동성이 줄어들고, 쾌락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큰 불안은 죽음으로부터 멀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불안감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죽음을 바람직하다고 믿진 않더라도 무시하는 것이다. 만약 사후(死後) 세계가 행복하다면 다행이고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고, 불행하다면 죽었기 때문에 모를 것이라 믿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서 죽음을 절대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실한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가. 오래 살면서 쌓아온 경륜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성찰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삶은 죽음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화와 대립한다. 죽음은 노쇠의 한 결과일 따름이다. 문제는 시시각각 노쇠로 인한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 데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게을러지면 늙은 것이다. 더 이상 놀라지 않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노인이다. 몸과 마음의 기능이 고갈되고 정지되는 것이 노쇠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나친 사회적 삶이 우리를 너무 일찍 노쇠하고 늙어버리게 하는 것은 아닌가.
노년이 되면 육체의 노화가 따라와 슬프고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몸은 허약해 활동할 수 없게 되고, 즐거움과 쾌락을 앗아가며 죽음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적당한 운동과 영양 섭취, 마음과 정신의 수양 등으로 노년에 대항해보지만 불가항력이다. 죽음이 노년에서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정신이 온전하고 감각이 온전할 때 자기가 이뤄온 삶을 스스로 해체해야 가장 멋지게 종결할 수 있다. 집도 집 지은 사람이 가장 쉽게 해체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다행인 것은 낡은 집은 허물기 쉽다는 것이다. 다만 노년은 너무 짧은 여생에 대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까닭 없이 포기해서도 안 된다. 저절로 해체되고 소멸할 것인데 무엇을 더 잡으려 하는가. 욕심이고 추(醜)할 뿐이다. 더 붙잡지 않으려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을.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의 죽음을 노인의 죽음보다 더 슬퍼하고 서러워한다. 전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물에 의해 꺼지는 것처럼 보이고, 후자는 불이 다 타서 저절로 꺼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설익은 과일은 강제로 따기보다 농익은 과일은 저절로 떨어진다 생각하는 것이다. 저절로 꺼지는 불꽃을, 농익어 떨어지는 과일을 안타까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래도 죽음은 가장 잘 익었다는 또 다른 모습이니 슬퍼하지 마라. 노년은 죽음을 무시할 수 있는 까닭에 젊은이들보다 더 대담하고 용감해질 수도 있다.
잃어버릴 것에 대한 상실과 슬픔을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진다. 삶이 쌓아놓았던 기억도, 기록도, 재산도, 자손도 모두 내게서 소멸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소멸 직전에 약간의 절차를 기대할 수 있다면 장례를 치르는 동안 영혼이 죽음을 준비하고 세상과 이별할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지막 로망이다.
죽음의 관건은 소멸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죽으면 다 끝이다.’라는 말이 맞는다면 정말 허탈하다. 영혼이라는 게 없어 죽는 순간 의식이 완전히 끊긴다면, 죽음에 대한 추모행렬이나 슬픔의 열기도 알지 못하고 그저 완전히 무의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뭔가 죽음의 길로 가는 과정도 없이 허무하다. 반면 영혼이 있다면 자기 죽음을 지켜볼 수 있을 테니 조금 위안은 된다. 슬픔으로 오열하는 부인과 자식들, 가깝게 지낸 지인들, 친지들… 보면서 영혼도 슬퍼할 수 있을 것이니. 슬픔과 안타까움 속에서도 사랑과 감사가 충만한 가운데, 장례 동안 원 없이 이승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세상을 정리하다 화장과 동시에 영혼이 하늘로 오르면 된다. 진짜 헤어지고 영원한 소멸의 순간이다. 안타까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들은 정말로 죽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잘 죽는다는 ‘웰다잉’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을 잘 죽는 것으로 여겼다. 죽음을 잘 준비해야 웰다잉도 이루고 천국도 갈 수 있다. 불가항력이라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저 숨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열정적으로 살고, 항상 도전하면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삶을 잘 살아내는 ‘웰리빙’이 ‘웰다잉’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키르케고르는 ‘삶 자체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지만, 식물이건 동물이건 종족 보존에 의한 유전자만 남길 뿐 영원한 생명은 없다. 인생이란 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존재했고, 존재했으니 사라지는 존재다. 세상 만물의 이치가 다 이렇다. 삶의 허무와 절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집착하는 욕망의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영혼의 불사를 믿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다. 그 영혼이 신의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린다고 믿든, 아니면 영혼이 육체가 죽은 후에 다른 생물의 몸을 가지고 환생한다는 윤회를 믿든, 남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다. 그러나 이 믿음을 잘못 쓰면 자기의 삶을 망칠 수 있다. 내세에서 영생하기 위해, 윤회의 다음 단계에서 좋은 삶을 얻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맛볼 권리가 있는 삶의 환희를 자기 손으로 억압할 수도 있다.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내생(來生)을 위한 오늘의 희생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현생(現生)의 내 삶에 충실하는 것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이다.
인간은 영생을 추구한다지만, 정말 인간이 죽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지금도 초고령화 사회라 난리고 준비되지 않은 현실을 질책하면서 ‘죽지 않는 영생’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죽지 않고 끝없이 사는 것이 인간에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현재의 모든 인간 사회 시스템이 유한한 인간 수명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죽음이 없다면 시간은 늘어지고 삶은 사소해져 버린다. 죽음이 없는 삶은 전혀 소중하지 않고 의미도 없어진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시간의 소중함을 알며 삶의 가치와 진실을 찾으려는 동기를 제공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의 사유를 통해 각자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죽음을 올바로 의식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혹은 죽음을 의식하는 것에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선물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가 더욱 열정적으로 활기 있게 살아가도록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나이 들수록 욕심이 많아지는 것은 잃어버릴 것에 대한 불안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늙음이 추하고 서럽다는 생각은 지나간 젊음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물욕이든 애욕이든 노욕보다 더 추한 것이 없고 의미도 없다. 노인은 젊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젊음을 간직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노인은 그가 살아왔던 길과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노년은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따라 빛나는 오늘의 축복일 수 있다. 김형석 교수님은 백 세까지 살아 보니 제일 편하고 좋았던 인생의 황금기는 인생 60부터 90까지라고 하지 않던가.
“때가 지나도 떨어질 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잎들이 보기가 민망스럽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산뜻하게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빈자리에 새봄이 움이 틀 것이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또한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지는 꽃도 또한 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의 종말로만 생각한다면 막막하다. 그러나 죽음을 새로운 생의 시작으로도 볼 줄 안다면 생명의 질서인 죽음 앞에 더 담담해질 것이다.” 법정 스님의 말이다.
미국의 이리라 바이오크는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에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사랑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할 것, 둘째, 용서하고 용서를 구할 것, 셋째, 작별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의 4가지 조건을 할 수 있는 죽음이 부럽다. 마지막 작별 인사만이라도 제정신으로 하고 떠나기를 희망한다.
독자 여러분! 죽음을 사유하는 의미에서 묘비명을 하나 써 보시지요.
[났노라~! 살았노라~! 죽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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