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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석연 Jan 12. 2023

57. ‘죽음(死)’의 의미(1. 출생과 죽음)

삶은 의미다 - 57

[*읽기 전에 : 오늘부터 유쾌하진 않지만, 좀 무거운 ‘죽음’이란 주제를 4회 정도에 걸쳐 다뤄보려 합니다. 죽음이란 주제가 불편하신 작가님, 독자님께서는 읽지 마시기를~!]

     

출생(出生)’은 태아가 모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고, 다른 말로 탄생이라 한다. 출생은 보통 개인이 직접적으로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을 나타내고, 탄생은 원래는 성인이나 귀인이 태어나는 것의 높임말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출생은 삶의 시작으로 한 사람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고, 법률상으로 사람이 권리 능력을 취득하는 시작점이다. 일반적으로 ‘출생’의 반대말로 삶의 끝인 ‘죽음’인데, 반대말이라기보다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말이다. 죽음의 시작점은 출생이다. 개인을 탄생시키는 생식이 없으면 죽음이라는 개념도 없다. 죽음을 만든 것이 탄생이고 일직선상에 있다

죽음()’ 또는 사망(死亡)’은 생명체의 생명이 끊기는 것을 말한다. 즉, 생명체의 모든 기능의 영구적인 정지로 말미암아 신체가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死(죽을 사)는 시체(歹) 옆에서 꿇어앉아 있는 사람(匕)이 소리 내어 우는 것(口)을 나타낸 글자로, 후에 口가 생략된 형태다. 같은 뜻의 한자 몰(歿)과 붕(崩)은 상층민이나 임금의 죽음을, 사(死)는 하층민의 죽음을 뜻했다.

의학계에서 죽음의 정의를 어디로 볼 것이냐는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사망 판정을 심장의 정지에서 뇌 기능의 정지나아가 호흡계까지의 정지 등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뇌사(腦死)와 식물인간 상태에서 안락사나 장기기증의 논란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뇌사와 심장사를 복합적으로 판단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모든 세포의 기능 정지를 사망의 기준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명체의 주인은 유전자이고, 육체는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운반 수단에 불과하다는 관점이라면 자식에게 유전자를 전달한 나는 죽지 않은 것이라 봤다. 내 후손의 대가 끊기면 그제야 죽은 것이다. 인류 영생의 꿈이 실현되는 해석이 아닌가. 꿈보다 해몽이 좋은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죽는다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에 따라오는 필연이다. 시작이 없으면 문제도 없는 것처럼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도 없다. 그렇다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서 탄생만큼 죽음도 중요한 이유다. 사람에게 있어 탄생이 자연스러운 첫 시작이고, '죽음'은 누구나 기다리는 자연스러운 끝맺음이다.

죽음은 일반적으로 매우 두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삶을 어둡게 보는 염세주의에 빠지고, 심하면 죽음 공포증이 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연스러운 본능이고,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방증이다. 한편,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긍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철학, 예술, 종교 등의 정신 활동에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발달한 것들이 많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극심한 공포, 죽음 이후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무지의 공포, 가족 등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의 공포, 평생 쌓아온 지식과 재산의 소멸에 대한 공포, 익숙하고 정겨운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다. 한마디로 삶의 좋은 점을 모두 박탈해간다는 것이다.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그 일 자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우리가 가진 생각 때문이다. 죽음도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는 생각, 그것 때문에 죽음이 무서운 것이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에 가깝다.

한편,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 찾기를 비롯하여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는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 정도다. 인류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제일 먼저,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永生)을 추구했다. 하지만 죽음만큼 확실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영생의 욕망은 달성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해지자, 다음으로 죽으면 이승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믿음이다. 그곳이 천국(天國)이고 극락(極樂)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부활(復活)과 환생(還生)의 믿음이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켜 종교의 영역으로 옮겨졌지만, 천국, 극락, 부활, 환생 등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은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결국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한다. 이 숙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숙명적인 죽음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하여 내가 저항할 수 있는가? 있다면 또 무엇인가? 선지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왔다. 그들이 발견한 죽음에 저항할 기회는 살아 있는 시간에 있고, 이 삶의 기회를 잘 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죽음과 가장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생동감 넘치고 삶의 희열로 꽉 찬, 그리고 작지만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음이 나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안타까운 건 그것이 개체의 소멸이기 때문이 아니라어쩌면 관계의 끊어짐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시간 동안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짜낸 관계의 직물은 죽음과 동시에 올들이 풀리고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타자와 세계에 맺었던 이어짐도, 그들 사이를 오갔던 말과 글도, 침묵과 허망함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자들의 가슴에는 상처만이 깊게 남는다. 

고대 철학자인 에피쿠로스의 죽음에 대한 통찰을 살펴보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성찰할 만한 기회를 제공한다.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내가 있는 곳에 죽음이 없고죽음이 있는 곳에 내가 없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모르고산 자는 살아서 가 본 적이 없으므로 죽음을 모른다. 죽음을 경험한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살아서도 모르고 죽어서도 모르니 죽음이 문(門)인지 죽음이 벽(壁)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죽을 운명의 삶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제 중요한 것은 삶으로 이동하게 된다. 불멸에 대한 헛된 갈망 대신에 현실의 삶에 집중하도록 해준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고 현재의 시간에 감사하며 삶을 누리는 것이 중요해진다. 또한 ‘죽음이 두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지 않는가?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무(無)라면, 우리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삶에 집중해야 한다. 즉,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가 똑같은 어둠이라면, 탄생과 죽음 사이에 주어진 우리의 삶은 빛의 시간이다. 두 어둠 사이에 태어난 삶은 축복이고 선물이니 이 찬란한 삶에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야 한다. 어둠을 바라보고 두려워할 것인지, 빛을 바라보고 환호할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최선을 다해 충분히 살고 자유롭게 죽어라어둠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찬란한 빛의 삶을 즐기라!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즐거운 삶과 쾌락의 의미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죽음을 바로 응시하거나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 안이하게 사는 사람은 결코 적절한 때에 죽는 행운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숙제를 남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서는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죽음을 삶의 의미로 연관시키지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이제 좋은 죽음혹은 바랄만한 죽음이 되려면 적절한 때에 죽는 것과 어떻게 살 것이지남김없이 충분히 후회 없이 살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러한 바람직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피하거나 억압하기보다는 똑바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하며, 죽음의 의미를 사유하고 통찰하면서 충분한 삶을 누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능력은 바로 죽음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던져진 존재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어둠과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죽음을 인식하고 매 순간 준비하는 인간만이 자신의 현재를 즐길 수 있는 멋진 존재가 된다죽음에 대한 사유는 죽음 자체에 몰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살아갈 삶의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세상과 자신에 대해 올바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사려 깊은 행동은 많은 것을 갖지 않더라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해준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 자체는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우리의 몫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이 어떠한가에 따라 우리를 억압하기도 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너무 무거운 죽음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우스갯말로 마무리~! 출생과 사랑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셋 다 우리를 다른 집으로 데려간다. 출생은 부모 집으로, 사랑은 살아 있는 남편(부인) 집으로, 죽음은 죽은 남편(부인) 집(무덤)으로~!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살기 위해 죽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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