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다 - 55
‘고통(苦痛)’은 아픔을 뜻하며, 통증(痛症)이라고도 한다. 신체 일부에 상해가 생겨 느끼는 육체적 고통과 불쾌감․우울함 등의 부정적 감정으로 괴롭다고 여기는 정신적 고통으로 나뉜다. 苦(쓸 고)는 뜻을 나타내는 艸(풀 초)와 소리를 나타내는 古(옛 고)가 합쳐진 한자로, 풀이 오래되면 쓴맛이 나기 때문에 ‘쓰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괴로움’, ‘고통(苦痛)’을 뜻으로 쓰인다. 痛(아플 통)은 뜻을 나타내는 疒(병들 약)과 음을 나타내는 通(통할 통)이 합쳐진 한자로 병들면 무언가 내 몸을 뚫고 통과해 가는 것 같은 고통이 생긴다 해서 ‘통증’, ‘아프다’, ‘괴롭히다’, ‘괴로움’을 뜻한다. 고통은 육체적․정신적 아픔을 포함하는 반면, 통증(痛症)은 신체조직 손상 또는 피해 등으로 발생하는 불쾌한 감각적·감정적 경험으로 주로 육체적 아픔을 말한다.
육체적 고통은 육체의 손상으로 인한 통증으로 산고, 부상 등에 의해 발생하고, 무통분만, 마취, 진통제 등의 의학 기술 발달로 상당 부분 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정신적 고통은 정신과적 치료를 통하여 감소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육체적 고통이 줄어든 만큼 정신적 고통을 더 크게 느껴진다. 정신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마약, 술 등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시적이고 임시방편일 뿐이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healing)’도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인의 몸부림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고통은 대체로 세 방향에서 온다고 한다. 첫째는 ‘자기 육체’, 둘째는 ‘외부 세계’, 그리고 셋째는 ‘관계’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우리의 쾌락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보다 고통을 주는 것이 훨씬 많다고 주장한다. 만약 세상에 고통이 쾌락보다 훨씬 더 많다면, 행복을 위해서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고 쾌락을 얻는 일은 차선임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극적 쾌락보다는 고통과 불행을 제거하는 소극적 행복의 길을 선택한다.
고통은 신경이 발달하여 아픔을 느끼는 동물의 생명을 지켜 주는 대표적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동물은 고통을 강하게 회피하는 살기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생명체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피하지도 못하게 된다. 사람이 간과 같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장기에 이상이 생겼을 때 사망률이 높은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이다. 몸의 어딘가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몸을 돌봐달라는 신호이다. 한마디로 고통이 없는 육체와 정신이라면 좋을 것 같지만, 생명을 지키기 위한 대처를 하지 못해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어 평균 수명이 뚝 떨어질 것이다. 한편, 부상 등으로 극심한 고통이 있어 빠른 수술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마취를 통하여 통증을 없애고 원인을 제거한다. 고통은 생명을 보존하는 필요조건이다.
심한 고통이 찾아오면 육체적인 스트레스와 정서적 긴장감이 더해져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흥분하면서 신체적인 조절이나 감당이 어려워진다. 두뇌 회전이 느려지고, 판단력이 떨어지고, 숨이 가쁘고 두근거리는 등의 모든 신체의 부조화 현상이 일어난다. 이 경우 끔찍한 고통으로 인한 정상적이 사고가 힘들어져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욕을 하는 일도 있다. 또한 심각한 고통을 느끼면 엔도르핀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는데, 사망 직전, 분만, 심각한 부상이 대표적인 경우다. 총을 맞았는데 아프지 않고 축축한 느낌만 들었다든가, 아기를 낳은 후 산모가 웃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들이 엔도르핀의 효과다.
고통을 철학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인간의 기술 발전과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운 일이 없었다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키고 예술을 창조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에서 가장 부정적인 면으로 고통이 지목되는 것만 봐도 인류의 발전사는 고통과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여러 가지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앞으로 기술 발전과 예술창조가 멈추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고통도 바이러스처럼 전염이 된다. 누군가의 아픔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데, 이를 ‘공감 고통(Sympathy pains)’이라 한다. 사람은 무언가를 보면 지각한 것을 실제로 자기가 행동하는 것처럼 뇌의 ‘거울신경’이 활성화된다. 고통받는 광경에 대해서도 똑같이 작동하고, 실제 그에 따르는 고통을 느낀다. 이런 뇌의 거울신경 작용은 무의식적이므로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아픔에 어느 정도씩 공감하는 능력을 지닌다.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고통에도 적용된다.
고통을 감소시키는 재미있는 연구를 하나 소개하면, 고통스러울 때 욕을 하면 고통을 감소시키고 잘 견디게 해준단다. 다쳤을 때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욕을 하면 더 쉽게, 오래 참아낼 수 있다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욕설은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울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악의가 없는 나름의 순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기발하고 창조적으로 욕을 하면 불쾌한 기분이 더 쉽게 나아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산모가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신랑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적인 욕을 퍼붓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가.
불교의 궁극적인 깨달음인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은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삶 자체가 고통이다.’라는 것이 부처의 가장 큰 깨달음이다. 생로병사가 고통이고, 미워하는 것들이 고통이고, 사랑하는 것과의 단절이 고통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고, 얻은 것에 집착했다가 잃게 되니 고통이고, 시작했으나 끝이 나니 고통이다. 고통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있다. 떠나는 것은 떠나게 하고, 끝나는 것은 끝이게 하라. 고통은 너를 떠나는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네 마음에 있다고 설파했다.
따라서 다른 어느 종교보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마음 수련을 강조하고, 한마디로 고통을 치료하는 종교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고통에 대한 수많은 불교 경전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가장 큰 두 가지 고통이 원증회고(怨憎會苦)와 애별리고(愛別離苦)이다. 원증회고(怨憎會苦)는 미운 사람과 함께하는 고통이다. 누구나 미운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미운 사람이 남일 때는 안 보면 그만이기 때문에 비교적 쉽다. 하지만 가족일 때는 매일 보면서 함께 살아야 하므로 정말 큰 고통이다. 원증회고와 반대로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다.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은데 헤어져야 하는 아픔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는 경험이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못 할 때 괴로운 것이 애별리고이고, 하기 싫은데 해야 해서 괴로운 것은 원증회고이다. 누구나 겪는 두 가지 고통이다.
그런 불교에서 찾아낸 고통의 원인은 ‘집착(執着)’과 ‘무지(無知)’란 말로 요약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불변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런 종류의 집착이다. 자신이 가진 삶도, 젊음도, 미모도, 부도 영원해야만 한다고 집착하는 순간 고통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수행으로 집착을 걷어내는 무소유, 비움 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무지(無知)의 가장 큰 부분이 욕심인데, 세 가지 욕심이 있다. 첫째,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가지려는 욕망을 탐심(貪心), 둘째, 나만 옳다며 성내는 것을 진심(瞋心), 셋째, 어리석음을 치심(痴心)이라 해서, 탐진치(貪瞋痴) 세 가지 번뇌를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마음이 우리를 병들고 고통스럽게 한다. 욕심의 결과는 고통이고, 그래서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는 거다. 한마디고 집착이든 무지든 모두 비우라(空)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고대 시대에는 고통이 신이나 하나님, 절대자가 주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기도, 굿, 제사 등의 종교의식을 통하여 고통을 피하려 했다. 근대로 오면서 고통은 자연이 준다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가뭄, 홍수, 화산, 태풍,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다. 자연이 주는 고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과학기술의 발달이다. 과학기술은 자연재해의 고통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또 다른 고통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일자리를 빼앗고, 각종 사고 발생으로 인한 고통이다. 현대의 고통 원인은 사람이다.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오늘날 인간이 겪는 고통의 80%는 다른 사람이 주는 고통이다.’라고 주장했다. 현대인의 삶은 자연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행복도 불행도 고통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이 호의적이고 책임을 다하면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욕심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당연히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이기심, 경쟁심은 수많은 고통의 원인이다. 호브스(Tomos Hobbes)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타인에게 해를 주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한다는 ‘인간의 늑대성’을 주장했다. 더 심각한 것은 자연보다 인간이 주는 고통이 심하다는 것이다. 고통 중에 제일 악독한 것이 인간이 주는 고통이라는 것이 딜레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자연재해라는 1931년 중국의 대홍수는 400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했지만, 2차대전 때 전사한 군인만 수천만 명이다. 유대인 600만 명이 이유도 없이 학살되기도 했다. 자연이 주는 고통은 인간에게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자연이 아닌 사람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불행하게 하는 세상,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느끼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할 뿐.
불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고통스러운 첫 숨을 몰아쉬며 우는 것으로 시작해서, 눈물겨운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고통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행복, 눈물, 고통 등이 모두 섞여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외롭고, 고통을 수반하는 험난한 길이다. 그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하는 건 슬픈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행복할 때는 같이 행복해하고 고통스러울 때는 그런 사람을 만나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행복이다.
누구든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생의 시작은 자신의 그림자와 같기에 고통받으면서도 그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열심히 운동하여 건강을 챙기는 것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신체적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고통은 힘겨운 우리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강화한다. 많은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을 때 오히려 위대한 성취를 이뤄낸다. 고통은 때로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준다. 더 강한 사람으로, 더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이를테면, 공포와 불안과 슬픔이라는 고통은 정신 건강에 해롭기만 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성장에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부정하는 건 곧 자기 잠재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뼈와 근육이 강해지는 것처럼,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정신력, 자존감, 공감 능력이 강해져서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고통은 일반적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정신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속적인 성찰과 훈련이 필요하다. 고통을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고통은 ‘벌’이나 ‘죗값’이라 여기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종교에서 고통은 ‘신의 시험’이라는 편견도 마찬가지다. ‘왜 하필 내게~?’,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하나님, 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등의 상황 적용은 고통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완전하게 제거할 수 없는 고통은 극복하는 대상이다.
누구나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없애버릴 수 없는 죽음, 질병, 노화와 같은 고통은 홀로 겪어야만 한다. 이러한 고통은 철저하게 홀로 서 있는 순간, 이 순간을 홀로 겪고 견뎌야만 얻을 수 있는 삶의 깊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없앨 수 있는 사고나 참사 같은 고통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예방해야 하는 고통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철저히 주관적이다. 고통은 홀로 맞서야 하는 주관적 체험이다. 주변 사람은 함께 걸어주는 것일 뿐, 고통의 의미와 해법 또한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나의 고통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고통은 극복하는 과정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사람은 보통 최악의 순간을 경험한 뒤에야 인생을 보는 관점이 확 바뀐다. 일단 극심한 고통을 겪어 봐야, 우리는 기존의 가치를 돌아보며 왜 그것이 도움이 안 되는지를 따져 본다. 우리에겐 일종의 실존적 위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객관적인 눈으로 내가 지금껏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았는지를 되돌아보고, 인생의 방향을 재설정하게 된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이유다. 그래서 ‘그 사람 변했어’라는 말을 듣는다.
성공의 비결은, 당신이 고통과 즐거움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즐거움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나 부처와 같은 모든 성자는 고통과 괴로움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눈에 있었다.
우리 삶의 고통, 슬픔, 두려움, 외로움 등과 함께하는 암흑기는 성장, 통찰,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무는 비바람을 견뎌야 하늘 높이 자랄 수 있다.
고통을 넘어 새로운 희망으로~!
고통과 시련을 획기적으로 성장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