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結婚)’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믿음을 기반으로 약속한 윤리적이고 법적인 계약’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사랑해서라는 이유가 첫째다. 사랑하지 않는데 결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결혼은 사랑 이외에도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욕망의 결과이기도 하다. 혼자서 외로운 것, 미래가 불안한 것, 경제적으로 부족한 것 등을 사랑을 빙자한 결혼으로 채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생존 본능에 의한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부정적이라 비난할 일은 아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결혼을 앞두고 완벽한 배우자를 구하겠다는 마음을 갖는다. 이상적인 결혼 상대는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데, 성(性)만 다른 사람’이다. 태어나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두 남녀가 어떻게 생각과 느낌이 같겠는가. 이룰 수 없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사랑하고 그립고 함께하고픈 순수한 결혼의 목적보다 조금이라도 덕을 보고 싶은 마음에 결혼 조건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결혼이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필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 옛날의 결혼이 아이를 낳아 같이 기르는 ‘남자 사람’ 혹은 ‘여자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한 영혼의 반려자인 솔메이트를 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을 찾기 전에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그래야 성숙한 사랑으로 결혼에 골인할 수 있다.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어떤 종류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흔쾌히 견딜 수 있어야 하고, 실망스러운 삶도 수용할 수 있을 때가 결혼할 때가 된 것이다. 상대에게 맞춰줄 준비가 되었을 때가 결혼의 최적기라는 말이다.
청춘남녀가 결혼을 전제로 처음 만날 때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결혼 후 변했다며 속았다는 마음, 실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 나의 주관과 시각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내 입맛에 맞도록 각색한 나의 책임이다. 상대의 능력이 100인데 200을 기대하면 실망하고, 50을 기대하면 만족하는 것처럼 전자는 ‘살아보니 이것밖에 안 돼’가 되고, 후자는 ‘살아보니 괜찮네.’가 되는 것이다. 주관과 시각을 벗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꼼꼼히 보면 그의 장단점이 그 모습 그대로 보인다. 상대의 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결혼의 전제 조건이다.
어떤 학자들은 결혼과 사랑이 함께한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행위라 한다. 어떻게 한 사람하고만 평생 잘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사람하고만 평생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사람만을 평생 좋아할 수 있을까. 이것은 감정과 성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단 한 사람과 소통하고 만족하며 살아가기란 근본적으로 힘든 존재이다. 하지만 결혼제도는 오로지 한 사람하고만 소통하며 살라고 만들어놓은 제도다. 이혼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맞든 맞지 않든 죽을 때까지 오직 한 사람하고만. 그러니 결혼은 원래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해서 하는 것이란 말이 나온다. 그래서 결혼하고 싶으면 사랑하지 말고 어떻게 필요한 사람이 될까 노력하면 된다나 뭐라나. 연애는 사랑해서 하고, 결혼은 필요해서 한다. 말이 되는가? 결혼한다고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 사랑한다고 다 결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필요조건이 많은 결혼일수록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많은 인생사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가치들이라는 사실이 좀 슬픈 현실이긴 하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나에게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다.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지만,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기하여서 그런 사람을 찾을 가능성은 작다. 현실적으로 가장 적합한 상대는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고, 취향의 차이를 지혜롭게 수용하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맞은 사람의 진정한 의미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원만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서로가 양보하고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결혼은 나에게만 치중했던 시간을 상대에게 나누어 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얻는 것이 있는 만큼 반드시 잃는 것도 있다.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둘이서 균형을 맞추어 나가야 하는 외줄 타기와 같다. 어느 한쪽의 과한 희생이 강요되어서도 안 되며, 행복보다 구속이 더 커서도 결혼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서로가 조율하는 기간이 필요할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혼전 동거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흔히 동거는 무책임한 관계라고 비난하지만, 둘 사이에 함께할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도 결혼이란 제도에만 의지하여 유지되는 관계가 더 무책임한 것 아닌가. 더 이상 맞지 않는 결혼생활을 멈출 수 있는 이혼이란 제도가 있지만, 이혼보다는 동거를 통해 서로에게 신뢰를 쌓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덜 소모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상대와 함께 사는 일이 나에게 주는 의미다.
사랑이 결혼의 추진 동력인 것은 맞다. 그러면 결혼은 사랑의 완성일까? 그렇다고 동의하기 쉽지 않다. 사랑의 가장 큰 속성이 비밀이다.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둘만의 성이 필요하고 외부와는 배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사랑의 은밀함은 외부의 이야기와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어야 할 사랑을 세상에 알려 광고하는 것이 결혼이다. 사랑은 모든 광고를 배제하는 두 사람만의 배타적 공간이다. 사랑에 광고가 등장하는 순간 그 사랑은 끝난다. 이렇게 사랑과 결혼의 속성부터 함께하기에 매우 부적절한 관계인 것이다. 그래 ‘사랑과 결혼의 두 가지 욕구를 결합하겠다는 것은 미친 생각’이라 하지 않던가.
하지만 결혼이 사랑과 행복만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지 않다고 결혼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결혼의 결과인 자식이 존재하고, 어떤 결혼이든 감사함을 찾을 수 있다면 결혼은 그런대로 의미 있는 행위다. 남녀가 ‘다르지만, 같이 가야 한다.’라는 것이 부부에게 주어지는 숙제이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은 아니지만, 사랑의 꿈을 이루어가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우리는 결혼한 것이고. 결혼이 사랑의 명약이 될지, 쥐약이 될지 모르지만, 사랑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 일이다. 결혼한 어느 누가 쥐가 쥐약인 줄 알고 먹었겠나, 명약인 줄 알고 먹었겠지. 어찌 되었든 지금은 내일을 어떻게 살아낼지를 고민하고 생각한다. 과거를 붙잡고 살지 말고, 다시 살아갈 방법을 배우면서 나아가야 한다. 실패한 사랑은 없으니까.
결혼하는 사람마다 사랑받는 며느리(사위), 사랑받는 아내(남편)가 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큼 어리석은 욕심이 없다. 사랑을 주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시어머니이고 남편이다. 당연히 나를 사랑해주는 건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기에 나는 관여할 수 없다. 사랑받을 마음 없이 내가 먼저 주는 것이 답이다. 그리해서 상대도 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러니 ‘사랑하되 사랑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내가 모두를 사랑할 수 없듯이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는 당연하고 가벼운 마음이라면 사랑싸움은 없을 것이다.
결혼생활이 늘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결혼은 사랑을 생활로 바꾸는 작업이다.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 딜레마다. 결혼생활은 시간이 지날수록 낭만에서 멀어져 현실에 가까워진다. 영원히 사랑에 머물러 있는 결혼생활은 드물거나 없다. 결혼이란 상대와 함께 더 큰 자유를 누리며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현실이란 조건 속에서 사랑은 서서히 물러나기 마련이다. 시간은 흐르고 삶은 지치고 감정은 메말라간다. 결혼이 사랑의 결실인 건 맞는데, 결혼이 사랑을 유지해주는 묘약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과 결혼이 기쁨과 행복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 맞다. 사랑과 결혼 속에는 기쁨과 행복 말고도 슬픔과 상처, 고통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 ‘가정이란 장소는 유배지’란 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이때 고통을 극복하고 살아내려면 사랑보다도 연민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불같은 사랑과 열정은 이기심과 지겨움이 자리 잡기 쉬워 오래 못 간다. 연민은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사랑이 식은 자리를 이기심이 없는 연민으로 채우면, 긴 앞날을 살아갈 수 있다. 결혼한 부부가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것은 사랑이 식은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이다. 서로 사랑을 달라 애걸복걸하지 말고, 가엾이 여기면서 사는 것이 백년해로의 지름길이다.
어떤 CEO는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말하지만, ‘배우자만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라고 말하는 중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다. 여기에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남자들이 하는 농담 중 “가족끼리 왜 이래?”, “가족끼리 섹스하는 건 근친상간이야.” 는 단연 최악이고 슬프다.
세상의 많은 사랑에 대한 연구자와 전문가들이 어떻게 몇십 년을 한 배우자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비밀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손녀가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와 그리 오래 살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할머니는 답했다.
“아주 간단해, 이혼을 안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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