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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사랑(愛)’의 의미(5. 사랑과 비밀)

삶은 의미다 - 85

by 오석연

‘비밀(秘密)’이란 ‘당사자 본인과 때로는 일부 이해관계자들도 알고 있지만 그 밖의 타인들에게는 숨겨서 공개하지 않은 사항’을 말한다. 세상에는 국가나 기업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극비 사항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도 크고 작은 비밀들이 비일비재하다. 생각해보면 온 세상은 전부 비밀투성이다.

일반적으로 비밀이 많다는 것은 숨기는 것이 많다는 말이다. 나쁜 게 아니라면 굳이 숨기느냐는 뜻으로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비밀의 목적은 사생활 보호, 치부를 숨기기, 적대적인 상대로부터 자신의 보호 등이다. 특히 사생활 보호 목적의 개인 정보 등의 비밀은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한편 비밀의 주체는 비밀이라고 믿고 있지만, 주변의 모두가 대체로 알고 있는 경우를 ‘공공연한 비밀(Open Secret)’이라고 한다.

인류학자 알프레드 젤은 ‘사랑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외부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연인들이 서로에게서 발견한 것들은 남들이 전혀 알 수 없어야 하고, 또 그들의 관계가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세상에 사랑보다 더 많은 비밀과 거짓을 감추고 있는 것도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이란 것이 서로를 발견하고, 친밀감을 만들어내며, 그러기 위해서 타인을 배제한 두 사람만의 독점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유명인이나 정치인의 베갯밑송사가 공개되어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다반사인 이유다.

‘사랑이란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정원에서 두 연인이 춤을 추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정원은 외부 사람의 시선을 차단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완전히 둘이 하나가 된 비밀 공간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꽃이 사랑이다. 연인들은 그 안에서 성적 고백을 주고받거나 어떤 비밀 행위도 할 수 있다. 그들이 사랑의 은밀함 속에서 주고받는 언행은 외부에 노출되어선 안 된다. 자기 사랑을 자랑삼아 하나의 줄거리로 만들어 이야기하는 순간, 그 사적인 공간, 배타적인 공간, 담장 안의 공간은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공개된 풍경 속으로 나아가 사라진다.

사랑은 둘의 침묵 지수에 비례한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침묵하기로 마음먹어야 사랑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 둘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배제해야만 하고, 이 배제가 둘을 더욱 결합할 것이며 영원토록 변치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모두를 배제하는 것은 비밀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두 연인은 타인을 배제한 침묵의 방으로 숨어 들어가 잠든다. 그 방은 타인의 출입이 금지된 침실이다.

누군가가 언론 등에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늘어놓는 것은, 자신의 침실 얘기를 털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삶의 내밀한 공간을 구축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의 공간은 모든 공개를 배제하는 두 사람만의 공간이어야 한다. 사랑이 공개되는 순간, 그 사랑은 끝난다. 여전히 애정 어린 포옹과 달콤한 속삭임에 취해 있던 연인은 갑자기 대중에 노출되어 무방비 상태로 낯선 사람들 앞에 알몸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순간, 자기가 사랑하고 있던 연인조차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다.

인간관계에서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접착제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관계가 좋은 때의 얘기다. 관계가 틀어지면 비밀은 약점이 되어 상대가 나를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포커판에서 패를 까 보이면 이기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가끔 사랑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너한테만 하는 얘긴데~~~’ 하면서 귓속말로 사랑을 들려주는 경우가 있다. 너한테만 한 이야기가 비밀로 지켜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다음날이면 나만 모르고 온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스캔들이 된다. 그때부터 그 사랑의 금이 가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든, 낯선 사람에게든, 혹은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든 사랑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랑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외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끝내고 싶다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랑을 그 독점적 성격에서 끌어내어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순간, 그 사랑은 종료된다. 사랑이 종료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더 큰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 연인과 함께하는 자리에 친구를 데리고 갔다가 친구에게 연인을 빼앗기는 사건은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얘깃거리가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개별적인 사랑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이 부끄러움은 뻔뻔스러움이다. 길거리나 노출된 공간에서 과감하게 애정 표현을 하는 커플들을 보라. 그들이 부끄러움이 있는가. 사랑이란 이미 피할 수 없는 벌거벗음이고 뻔뻔스러움이다. 그들의 애정 표현 장소는 어디가 되었든 둘만의 공간이고 비밀스러운 장소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있을 수 없고 뻔뻔스러운 것이다. 물리적으로 열려 있는 공간은 사랑의 행위에서는 벽으로 둘러쳐진 비밀의 공간으로 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인간은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옮겨가면 외로움과 고독이 내려앉는다. 더구나 침묵의 시간은 견디기 어려운 고독감을 주지만, 사랑의 비밀과 침묵에서는 예외다. 가장 황홀한 외로움과 고독으로 전환된다. 둘이 하나 되어 움직이는 모든 행위는 그 어떤 쾌락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아무도 필요 없고 너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 비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입이 가볍거나 정직함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정보까지 털어놓은 사람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에서는 솔직한 것이 미덕이 아니다. 나만의 비밀을 이야기했지만, 그 비밀에 포함된 또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열정에 사로잡힌 고독. 감출 줄 모르는 자는 사랑할 줄 모른다. 사랑의 중요 금지 수칙이 무엇인지 아는가. 침묵하고, 소리를 내지 말며, 말하지 말 것이다. 모두 비밀을 지키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벙어리가 가장 잘할 것 같다.

결혼은 사랑을 세상에 공개하고 내놓는 일이다. 사랑은 타인에 대한 비밀이고 배타적이고 은밀하고 사적이고 공적일 수 없는 반면, 결혼은 공개적이고 광고적이고 공적이다. 많은 하객 앞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하지만, 사랑의 비밀 원칙에서 보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인 약속이고 맹세다. 그래서 사랑과 결혼의 두 가지 욕구를 결합하겠다는 것은 ‘미친 생각’이라 하지 않던가. 그래서 결혼식을 마치면 짧지만 둘만을 비밀을 지켜주기 위한 신혼여행을 떠난다. 신혼여행을 밀월(蜜月)이라 하는데, 혼례 기간의 성교를 위해서 사회에서 격리하는 기간이다. 신혼부부의 결합을 위하여 친지 및 친척들의 거처와 완전하게 분리할 목적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다. 신혼여행도 사랑에 비밀 원칙이 지켜진 결과이다. 사랑의 비밀 원칙에 따르면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부터 결혼과 사랑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동감하는가?

육체의 문을 여는 것이 영혼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은밀한 사랑의 속내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하면 안 된다. 나체로 몸을 내맡기지 않는 여자에게 남자는 속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나체로 몸을 내맡기지 않는 남자에게 여자는 속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말해질 수 없는, 많은 사람의 공개된 이야기로 존재할 수 없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말로 맺는다.


‘사랑의 궁극적인 형태는 비밀의 사랑이다. 살아가는 동안 줄곧 사랑으로 자신을 태우고, 사랑하는 자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사랑으로 인해 죽는 것, 그러한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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