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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질문(質問)’의 의미

삶은 의미다 - 74

by 오석연

‘질문(質問)’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묻는 것’을 말한다. 質(바탕 질)은 ‘바탕’을 뜻하는 한자로 ‘양(量)’에 대해 ‘양/질’로 대응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問(들을 문)은 뜻을 나타내는 口(입 구)와 소리를 나타내는 門(문 문)이 합쳐진 글자로 ‘묻다’라는 뜻이다. ‘물음’이나 ‘질의(質疑)’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질문은 일반적으로 답을 모르는 연소한 사람이 답을 알고 있는 나이가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경우가 많다. 문제나 궁금한 점을 질문함으로써 해결하게 되는 과정이다.

질문에 연관되어 ‘답정너’와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 ‘답정너’는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말의 줄임말로, 주로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을 미리 정하여 놓고 상대방에게 질문을 하여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하게 하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이른다. 상대방이 정해진 답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말해주지 않을 경우,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똑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하기도 한다. 한때 ‘답정너’라는 말이 유행하고 이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적도 있었다. 요즘 정치권에서 요란스러운 ‘답정기소’도 답을 정해놓고 한다는 같은 의미이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은 글자 그대로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대답’이라는 뜻의 사자성어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때와 장소에 올바르게 대답했을 때 칭찬의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우문현답’이라는 책도 있는데, 그 책에서는 ‘리의 제는 장에 이 있다’의 줄임말로 재치 있게 썼다.

학교의 수업 현장에서 사용하는 ‘발문(發問)’이 있는데 질문과는 차이가 있다. 발문은 수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학생의 사고와 이론을 자극․유발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문제를 제기하며 묻는 것이다. 반면 질문은 자기가 모르거나 의심나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아보거나 일정한 대답을 기대하면서 물어보는 것이다. 발문은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고, 질문은 모르는 사람이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다. 질문은 내가 알기 위하여 모르는 것을 상대방에게 물어보는 것이라면, 발문은 상대방을 깨우치고 학습을 촉진하기 위하여 학습자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질문은 내가 나를 채우고 아는 지식을 쌓기 위해서 하지만, 발문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서 묻는 것이다.

발문의 종류는 수렴적 발문과 확산적 발문이 있다. 주어지거나 기억된 자료의 분석과 종합을 이루게 하며, 번역, 관련, 설명, 결론, 도출 등과 같은 정신적 활동을 자극하려는 수렴적 발문과 학생 스스로 자료를 산출하게 되고, 고안하고, 종합하고, 정교하게 하여 상상적이고 창의적인 대답과 높은 수준의 사고를 끌어낼 수 있는 확산적 발문이 있다.

질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야가 공부와 인간의 삶이다. 공부는 혼자서 생각하고 질문하며 답을 찾는 과정을 거쳐야 완전한 자기 것이 될 수 있다. 선생님을 밥을 짓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지, 나의 밥을 대신 먹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 밥은 내가 먹어야 한다. 특히 혼자 공부하는 독학은 순전히 나를 향한 질문을 끌어내고 나의 대답을 통해 공부하는 것이다. 내 것을 좀 더 확실하게 남겨주는 방법이다. 호기심 가득한 질문으로 생각의 운동을 통해 터득한 지식은 온전한 내 것이 된다. 공부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질문을 던져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특히 공자와 같은 옛 성현들은 제자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른 답으로 제자가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도록 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정답이란 것이 없고, 사람마다 당연히 달라야 하지 않은가. 자신만의 답을 찾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은 공부의 난제가 아니라 열쇠라 할 수 있다. 적합하고 정확한 질문은 진리의 빗장을 풀고 우리를 진리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게 안내하는 길잡이다.

소크라테스는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따져 묻고 검토해 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삶은 가치 없는 인생이다.’라고 말하며, 질문에 답하는 과정의 ‘산파술’로 상대방을 가르치고 설득했으며, 지식을 쌓는 교육에서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끝없는 질문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지식을 터득하고 새로운 학문의 체계를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들을 의심하여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결과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질문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교육법 중 하나이며, 모든 학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턴가 무엇을 물어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것이라는 이상한 문화가 생겼다. 특히 활발한 질문과 대답이 이루어져야 할 학교 교실에서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질문하는 교사도 없고 물어보는 학생도 없다. 어떻게 교사와 학생 사이에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으로 가득한 교실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jfif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하는 거다.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본질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정답만 잘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하여 꼭 필요한 질문을 하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모든 학문의 시작이 의심에 의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지만, 특히 철학과 과학은 호기심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위대한 철학자들도 삶에 관한 질문을 무수히 던지며 삶의 지혜를 구해왔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사는 삶은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의미 있는 삶, 성공하는 인생의 비결은 무엇인가? 품격 있는 인생, 행복한 삶에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 등 근원적인 질문에 최선으로 응답하는 삶과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삶을 결정하는 존재 이유에 관한 질문들이 삶을 충실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잘못된 질문으로부터 제대로 된 답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질문 없는 삶이나 시대에 편승한 영혼 없는 질문들은 우리 삶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없다. 돈, 권력, 명예 등과 같은 시대를 반영하는 질문은 하나 같이 정답이 하나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많고 커야만 행복하다는 정답. 하지만 이 많은 사람에게 똑같은 하나의 정답밖에 없는 것이 맞는가?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인간이며, 그리 사는 게 무슨 사람의 삶인가. 하나밖에 없는 정답을 따라가는 삶은 그런 세상 속에 포함되어 있을 뿐 고유의 내 의미가 존재할 수 없다. 한 가지 정답과 기준만으로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줄 세우는 방식은 너무나 많은 패자만 양산할 뿐이다. 잘못된 정답을 구하기 위한 어리석은 질문에 매달리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우리의 삶이 편리해질수록 질문 던지기를 귀찮아한다. 지금까지와 같이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편리한 삶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을 뿐, 어떤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묻지 않는다. 또한 철학적이고 삶의 근본적인 질문은 고사하고 기본적 삶에 관한 질문도 고민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스스로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다가 아주 가끔, 나이 들고 세상 속 나의 부재를 생각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을 하고,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없어지는 날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영원한 시간 속에 살지 못함을 괴로워할 뿐이다.

요즘 MZ세대들의 근거를 묻는 질문에 기성세대를 적잖이 당황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조직에서 어떤 일을 지시하면 ‘제가요? 왜요?,’하는 식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나 근거를 확실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들이다.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던 기성세대는 그런 질문에 길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이렇게 효율보다는 나의 본질과 가치를 찾아가는 마음은 산업화 사회의 기성세대나 현재의 MZ세대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적극적으로 표현한 세대가 MZ세대일 뿐이다. 그들의 질문에 당황하며 비난하거나 탓하지 말고, 이 기회에 자기의 본질을 찾아 나서며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변화된 세상에 적응해가는 연륜의 지혜가 아닐까.

부부 사이에 흔히 던지는 ‘다시 태어나면 나와 함께 살 건가?’라는 질문이 있다. 속으로는 ‘당연히 딴 놈이랑도 살아봐야지. 미쳤냐 너랑 또 살게’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리 대답하지 못한다.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다시 태어난다’라는 가정법의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차라리 미래 지향적인 ‘지금까지 산 것처럼 살 건가요?’라고 물어라. 후회하면 후회하는 대로, 만족한다면 만족하는 대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이정표가 되는 질문이 좋은 질문 아닐까. 오늘이 남은 생의 제일 젊은 날이라 하지 않던가. 남은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부터다. 인생의 황혼기가 아니라 황금기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며 질문을 던져라. 삶은 인생의 좋은 질문에 대한 지혜로운 대답을 구하는 과정이다.

질문과 권력의 관계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우위에 있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질문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진 자다. 그래서 질문에 답하지 말고, 왜 그 질문을 하는지 다시 질문하라는 규칙이 있다. 질문하는 사람이 되라. 질문하는 사람이 지도자다.


질문의 수준이 그 사람의 수준이다. 삶의 질문, 창의적인 질문, 도전적인 질문, 미래를 읽는 질문을 고민하고 질문의 달인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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