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謙遜)’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보다 뛰어난 자들이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謙(겸손할 겸)은 뜻을 나타내는 言(말씀 언)과 소리를 나타내는 兼(겸할 겸)이 합쳐진 한자로, ‘겸손(謙遜)하다’를 뜻한다. 遜(겸손할 손)은 뜻을 나타내는 辶(쉬엄쉬엄갈 착)과 소리를 나타내는 孫(손자 손)이 합쳐진 한자로 역시 ‘겸손(謙遜)하다’, ‘겸양(謙讓)’ 등을 뜻한다.
동양에서 겸손은 최고의 미덕 중 하나이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대에게 폐가 될 수도 있다. 그래 ‘과한 겸손은 교만이다.’라는 말도 있다. 칭찬이 지나치면 아부가 되는 것처럼 겸손도 완급 조절이 꼭 필요한 행동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한 겸손의 표현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가까운 가족 등에 대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식을 소개할 때 ‘제 자식놈’, ‘부족한 게 많은 놈’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은 보면 가족에 대한 지나친 겸손이 당연시되었다. 오죽하면 ‘자고로 돈 자랑, 자식 자랑, 마누라 자랑은 하지 말랬다.’, ‘자식 자랑,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지금도 가족에 대한 자랑은 축하는커녕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과거에 자기 PR(Public Relations)을 하는 것을 격 떨어지는 행동, 겸손하지 못한 행동으로 폄훼하였으나, 미국식 사고방식과 제도가 들어오면서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홍보 등이 성취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프런티어 개척 정신에 입각한 진취적인 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전통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겸손을 크게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겸손이라는 개념이 동양에 비해 적은 사회이다.
실제 부모 된 처지에서 보면 타인이 나를 칭찬하는 것보다 자식을 칭찬해주는 것이 훨씬 기쁘다. 나는 지금도 타인에게 제일 듣기 좋은 자식 칭찬이 ‘자식이 나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들을 때이다. 속마음은 이러하면서 타인 앞에서 스스로는 자식을 과하게 낮추는 것이 예의처럼 되어 있었다. 근래 이러한 과도한 겸양 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이렇게 지금은 자기 PR 시대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서양에서도 겸손을 미덕으로 중시했다. 성경의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언 29:23),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편 149:4) 등의 구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겠지만, 겸손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긴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 인간은 너무나 작고 죄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주제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당연한 겸손이며,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다.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로 낮춘다. 가장 위대한 겸손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인데, 기도 안에서 신과 마주할 때 이것을 알게 된다. 신과 마주 대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지닌 게 없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 앞에서 신과 마주하듯 대한다면 가장 멋지고 위대한 겸손이 되지 않을까.
국가나 사회적으로 ‘질투 관리’를 위하여 ‘겸손’이 강조된다는 사실을 아는가. 인간 문명은 질투의 역사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동생 아벨을 살해한 카인의 후손이 인류이다. 질투는 인류의 운명일 수밖에 없다. 인류는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문화적 장치를 동원해 질투를 관리한다. 하지만 법과 제도, 윤리와 도덕, 세금과 복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는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하고, 타인의 질투를 일으키지 않도록 ‘겸손’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결국 많은 것을 알고 많은 역할을 할수록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겸손의 상대되는 개념과 행실을 ‘교만(驕慢)’이라 한다. 하지만 교만과 겸손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다. 내 생각이 항상 옳다는 교만, 내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겸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 내가 아니라도 잘 될 수 있다는 겸손. 서운한 마음은 교만, 미안한 마음은 겸손. 내가 부족한 대접을 받는다는 교만, 내가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는 겸손. 교만하면 손해가 따르고, 겸손하면 이익이 따른다. 이렇게 교만과 겸손은 상대되는 개념이고 행실이지만 마음속은 백지 한 장 차이다. 겸손이 부족한 마음이 교만으로 ‘~척’ 또는 ‘코스프레’ 언행이다. 특히 교만에서 나오는 ‘~척’하는 행위는 꼴불견으로 예로부터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하지 말랬다. 이런 꼴불견을 ‘삼척동자’라 하던가. 요즘 정치권에서 화제가 되는 정치인 삼척동자는 ‘착한 척, 정의로운 척, 가난한 척’으로, 뉴스를 장식하고 문제가 되는 것도 겸손을 찾아보기는커녕 교만을 넘어 거짓과 위선의 가면만 보이는듯해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사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을 ‘운전수 지식(Chauffeur's knowledge)’이라 하고, 겸손을 팔아먹은 ‘~척’하는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이 보기 민망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겸손이란 더 보탤 것도, 덜어낼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일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면 상대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건강한 겸손이다. 건강한 겸손은 무조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대방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 겸허한 자세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건강한 겸손을 지닌 사람은 나이나 경제적 능력 등을 앞세워 상대에게 군림하려 들지 않으며,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겸손에 대한 가르침으로 공자는 <논어>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했고, 버나드 쇼는 “무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아는 척하는 마음을 가르쳤다.
한편 겸손함 마음을 가지면 상대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다. 나는 잘 할 수 있지만 상대는 잘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보살피는 마음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잘 살펴 가르쳐주는 것이 겸손이다. ‘그것도 모르느냐’라며 핀잔이나 무안하게 하면 교만이고 어떻겠는가. 나보다 공부는 못하더라도 춤과 노래는 훨씬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이성’이라 한다. 이성을 뒷받침해주는 정서적 태도가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겸손과 객관성은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칸트가 말하는 겸손이 바로 이성적인 겸손이다. 칸트는 겸손을 “자기 자신을 의존적이며 오염되었다고 여기지만 능력이 있고 가치가 있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생각하는 삶의 태도”라고 정의한다. 겸손은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것과 동시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라는 이야기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셈이다.
현대인 대부분은 겸손함을 잊어버리고 직업, 명예, 그리고 재산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내 것이라고 뽐내며 살아왔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꼭 죽어봐야 아는 것인가. 죽어서 알아도 이미 때는 늦었다.
죽기 전에 영원한 내 것이 없음을 깨닫고 하루라도 빨리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그 하루가 시작되는 날이 오늘부터 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