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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느려터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긴 일

신축 아파트나 깔끔한 최신식 건물에 가면 어김없이 고속 엘리베이터가 우릴 반겨줍니다. 여기서 아파트는 배제하고 일단 '최신식 건물'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볼게요. 그런 깔끔한 건축물에 간다는 건 보통 목적이 있어서였어요. 아이 학원에 방문한다거나, 강의가 있거나 촬영이 있는 경우.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경우였죠. 왜, 목적이 있으면 움직임이 빨라지잖아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그런 건물엔 대부분 외관에 걸맞는 신식 엘리베이터가 있고, 빠른 속도로 원하는 층까지 데려다줍니다. 너무 좋아요. 특히 바쁠 때 말이죠.


하지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를 반겨주는 건 '느려터진' 엘리베이터입니다. 지은 지 30년 정도 된 아파트라 그런지, 도중에 교체 공사를 한 건 데도 느린 녀석으로 골라 넣었더라고요. 이건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낡은 건물에 빠른 엘리베이터는,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거든요.


꽤 높은 층에 살고 있는 저는 수리 중이 아닌 이상 늘 녀석을 애용합니다. 아무리 느려도 이만한 게 없어요. 계단으로 못 갈 높이는 아니지만, 내 무릎은 소중하니까요.


느리기만 한 게 아닙니다. 좁기까지 해요. 가끔 이웃들과 함께 타게 되면, 숨소리까지 공유할 수밖에 없답니다. 친한 사이거나 아는 이웃이면 그래도 좀 나아요. 느리게 오르내리는 시간 동안 안부도 묻고, 충분히 인사를 나눌 시간이 있어 오히려 좋기도 하고요. 좁은 거리가 그리 불편하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거울을 보며 못다 바른 립스틱을 꼼꼼히 채워 넣고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근엄하신 중간층 할아버지가 들어오십니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라 소리 없이 목례를 하며, 서둘러 립스틱을 집어넣어요. 미처 바르지 못한 여백은 위아래 입술 문지르기 신공으로 메꿔줍니다. 어르신들과 함께 타면 보통 두 손은 공손히 모아지고, 짝다리도 고쳐 서게 돼요. 에헴, 헛기침이라도 하시면 뭐가 불편하신가 살짝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땀냄새를 풍기며 운동을 하고 들어오는데 먼저 엘리베터를 기다리고 있는 이웃이 있으면 다시 나가 바깥을 맴돌기도 해요. 넓은 공간에 환풍기도 팡팡 돌아가고 초고속으로 몇 초 만에 올라갈 수 있다면 그러지 않겠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반평도 채 안 되는 그 공간에선 상대의 체취까지 향유하는 사이가 되어야 하거든요. 뭐 물론 아주 급할 땐 에라 모르겠다 그냥 타긴 합니다만...




그런데 얼마 전, 제 생각이 바뀐 일이 있었어요.


우리 네 식구가 자전거 두 대를 가지고 운동을 다녀왔어요. 네 대 모두 챙기긴 번거롭고 그런 날, 두 대만 가지고 나가서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를 번갈아 하는 거예요. 이거 괜찮더라고요. 어쨌든 상쾌하게 운동을 하고 들어오는 길, 아이들 자전거라 크지 않아 한 번에 모두 탑승할 수 있었어요. 막 문을 닫으려는데 저기서 배달기사님이 종종걸음으로 올라오시더라고요. 재빨리 벽으로 붙어 공간을 만들어드리고, 망설이는 기사님을 안으로 모셨어요. 가운데 작고 둥글게 만든 공간으로 입장하시며 민망한 듯 웃으시던 기사님. "실례 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저희는 "아이코 아니에요, 자리 충분합니다!"라고 답해 드렸고, 가을바람이 섞인 서로의 상큼한 땀냄새와 정체된 엘리베이터 공기, 거기에 기사님의 음식 냄새까지 섞인 신비로운 향기를 맡으며 목적 층까지 올라왔어요. 인사도 나누지 않고 전혀 모르는 사이의 사람이었다면 좁은 공간에서 그런 냄새가 참 힘겨웠을 텐데, 말을 섞고 미소와 대화가 오가고 나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건 그냥 사람 사는 냄새일 뿐이었습니다.


예전에 인터넷 공간에서, 어느 오피스텔에 붙은 공지문 아래에 쓴 손글씨가 화제가 된 적 있었어요. 입주민끼리 마주치면 인사라도 하고 지내자는 메모였지요. 거기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써 내려간 답장들.. 무척 반가워하면서 사실은 서로 궁금해하며 지냈다는 이야기들. 그걸 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응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대수가 많지 않은 아파트라 그렇게까지 하면 어차피 누구인지 다 알 거고, 차라리 먼저 용기 내 인사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도전해 보진 못했어요. 하지만 그런 기사를 보며 흐뭇해지고 시간이 금인 배달 기사님의 엘리베이터를 잡아 드리며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아직은 제 마음이 그렇게 각박해지지 않은 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생각한다는 건 다른 많은 사람들도 공감하는 거라는 데, 우리 이웃들도 같은 생각일까요? 그저 빠르지 않아 답답하다고만 느끼는 건 아니겠죠?


물론 저도 급할 때는 답답합니다. 특히 화장실이 급할 때요! 저야 어른이니 미리미리 해결도 하고 참을 줄도 알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느려터진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마침내 대문을 열고 현관에 입장해 긴장이 풀리며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건.... 그게 누구인지는 끝내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저는 의리 있는 엄마니까요!




+ 긍정적이고 밝은 느낌으로 글을 쓰려했으나 제목부터 '느려터진'이라는 자극적인 뉘앙스를 풍긴 점, 살포시 사과드립니다. 오랜만에 이야기하는 식의 글을 써 보고 싶었어요. 역시 '문어체'보다는 '구어체'가 입에 착착 붙고, 손가락 끝에서도 맘 편히 뛰어노네요. 덕분에 단어 선정도 격렬해지고요! 그래도 제 글에선 자주 등장 할 예정이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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