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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에 민감한 이팀장입니다만

의연하고 쿨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나는 팀장이다.

팀원은, 없다.

처음엔 이상했다. 하지만 곧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제 민하씨가 팀장이에요. 기획팀장 좋다. 어때요?
(그럴듯해서 좋긴 한데) 팀원도 없는데 팀장이라 하기 좀 민망하긴 하네요, 호호호.


하고 겸손히 웃는 건 얼마 가지 않았다. 팀이 있으니 팀의 장이 있는 거지, 하며 곧 스스로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메일로 업무를 할 때마다 팀장님이라 불려지는 게 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직책은 팀장, 직위는... 따로 없다. 뭐 그냥 각종 매니저로 통한다.


앞날이 창창한 우리 회사는 아직 직원이 몇 명 되지 않는다. 일당 백은 기본. 이게 또 쏠쏠한 매력이다. 약간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사람들은 모르겠지, 모를 거다. 아니 몰라야 한다. 내가 1인 다역을 하고 있다는 걸.

컴퓨터로 모든 업무를 할 수 있는 우리 회사. 주로 접하는 분들은 개인 또는 업체 담당자. 전문 용어로 B2C, B2B 뭐 이러던데, 잘은 모르겠고. 나는 그 모두를 골고루 매일 만난다.


안녕하세요, OOOOO 기획팀장 이민하입니다.
안녕하세요 OO님, OOO매니저입니다 :)
안녕하세요~ OO팀입니다!


일하는 상황, 방식, 내용, 상대에 따라 나의 소개도 달라지고, 말투도 달라진다.

어떤 일이든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좀 더 회사를 대표하거나 무게감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선 좀 더 간결하고 깔끔하게. 불필요한 이모티콘이나 부호는 쓰지 않는다. 반면 좀 더 친근함이 필요한 개인고객님을 상대하는 경우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E적 성향이 뼈속부터 우러나온다. 팔팔 끓여 우려내는 사골국물 마냥.


안녕하세요, OO님! :) 저희 OOO를 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OO 잊지 않으셨죠? 늘 노력하는 OO가 될게요~❤


갑자기 새댁 시절 시엄니한테 전화할 때의 혀 짧던 며느리가 된 것 같다. 음. 이정돈 아니었나?

그동안 나도 고객으로서 수많은 CS 상담원 분들과 통화를 해봤지만, 역시. 나는 좀 잘하는 것 같다. 체질인가. 그들의 말투보다 내가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은 모두 화면 속에서의 내 모습이다. 키보드 위에서 타닥거리는 인사말이 상대방의 컴퓨터 화면 또는 휴대폰 액정 위로 전해진다. 참 신기한 세상.


가끔 업무용 전화기가 울리기도 한다. 대부분 컴퓨터를 통해 메일과 카톡 등으로 대화를 하다 보니 초반엔 전화가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전화벨만 울려도 쿵 하고 떨려오곤 했었다. 뭐 지금은, 누가 걸었는지 쓱 보고 펜을 집어 들면서 바로 전화를 받는다. 발신인과 주고받았던 메일을 빠르게 검색해 화면에 띄워놓고 커닝하면서.

하도 많은 상대와 업무를 하다 보니 전화를 받자마자 그와 관련된 세부 업무를 바로 다 떠올리는 것은 무리다. 처음엔 그게 하도 떨려서, 전화를 바로 못 받고 주고받은 메일을 찾아 충분히 확인한 후에 다시 걸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은 빠른 적응의 동물, 이젠 뭐. 받고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기다리라 하고 찾으면 된다. 천천히 하는데 뭐라 하는 사람 한 명도 없고, 그도 나와 마찬가지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다.



몇 번 되지 않지만 카페에서 일하던 날의 모습. 집에서보다 우아해 보인다.



하지만 가끔 아직도, 나는 더 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적인 관계에서도 문자나 카톡 대화에서 오해가 잘 생기듯, 업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업체 담당자는 초지일관 무뚝뚝 그 자체다. 우리의 한글이라는 게 사실, 그 어떤 이모티콘 없이도. 별다른 부호 없이도 충분히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데. 스마트폰이 생겨난 이후로 이상하게도. 아무 부호 없는 글에서의 냉기는 참을 수가 없다. 뭐 나도 지금 이렇게 여기 이 글을 쓰며, 특별한 기호 없이 잘만 쓰고는 있지만. 유독 참 싸-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분들도 이렇게 자신의 글을 쓸 때는 안 그렇겠지. 정성껏 감정을 담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업무'이지 않은가. 그들도 일에 지쳐 있을 것이고, 최소한의 타자로 빠른 일 처리를 한 뒤 퇴근을 하고 싶은 직장인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다. 그런데 나도 사람인지라.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데 자꾸만 서운하다.

그럴 땐 방법이 하나 있다. 이건 비밀인데, 상대를 그럴듯한 드라마 속 회사원으로 상상하는 거다. 그러면 이런 딱딱한 말투도 용납이, 아니 용서가 된다. 얼마나 멋있을지 참. 말쑥한 슈트를 입고 나에게 메일을 쓰고 있는 손석구 부장님, 현빈 과장님? 정도로 상상해 본다. 음, 미안하다.

사실 이건 그냥 해본 말이고(업무 특성상 여성 담당자분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로 이런 오해는 보통 전화 통화를 하면서 사그라든다. 한 번은 메일에서 굉장히 딱딱한 말투의 여자분이었는데, 그래서 뭔가 화가 났나 싶기도 한. 너무 건조한 말투의 그녀와 직접 통화를 하고서야 오해가 풀렸다.


예~ 아닙니더. 그렇지예, 감사합니다, 예예.


그녀는 내 예상과 달리 구수한 사투리를 쓰시는 이모뻘 느낌의 중년 여성분이었다. 목소리는 따스했고 말투는 친근했다. 갑자기 엄마나 아빠 또래 분들이 궁서체 느낌으로 카톡 하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괜한 오해를 한 거구나, 싶었다.


그 후로 웬만해서는 이메일에서의 말투로 쉽게 오해하지는 않는다. 다만 정말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본론만 딱, 얘기하는 담당자들은 좀 마음의 거리가 생기긴 한다. 정말 일을 잘한다 싶은 분들은 짧지만 내 이름 또는 직책을 친근하게 불러주고, 간단하지만 다정한 인사말을 빼놓지 않는다. 별 것 아닌 듯해도 이거 참 별거다. 그 흔한 웃는 이모티콘 하나 없이 정말 고급스럽고 우아한 메일을 주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을 통해 많이 배운다.)


고객 분들과의 사례도 있다. 본인이 확인하지 못한걸 뒤늦게 당당히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안 되는 일인데 부러 잘 챙겨드리거나 혜택을 드렸는데도 너무나 당연한 듯 쌩-하고 받아 가는 분들도 있다. 메일 속, 문자 속 얼굴 없는 매니저이다 보니 마치 AI 기계에 상담하듯 하는 분들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재택근무하는 애엄마로서, 나하고 비슷한 동네 엄마들일 텐데,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너무 편하게 대하시는 건가 싶고. 실제로 만나면 이러지 않으실 텐데 하고 욱하는 마음이 드는 걸 애써 누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도 평소에 어딘가에 이런 요청을 할 때, 상담해주는 분들께 어땠었나 돌아보게 되는 건 자동 반성 코스다.


업무 초기 이렇게 흔들리는 나의 마음을 대표님에게 그대로 노출해버릴 때면, 그녀는 너무나 노련하게도, 항상 날뛰는 이팀장을 달래 놓곤 했다. 바로 이 문구로.


의연하고 여유 있고 쿨한 척, 지금처럼 잘해주세요.(미소)


와 진짜. 우리 그녀는 너무 쉽게 상황을 정리해주는 기술을 갖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진정이 된 경험이 세 번 정도 쌓이자, 나는 포스트잇에 이렇게 써서 책상에 붙여버렸다.


의연하고 쿨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내 맘대로 정해버린 우리 회사 사훈



우아한 우리 대표님의 철학이 내게도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사훈으로 건의했다. 받아들여졌는지는 모르겠다.

그 흔한 동료 한 명 없이 외로이 방구석 업무를 하는 이팀장을 조련하는 그녀.

와, 진짜 재수 없게 멋있다.










#저 말고도 재택 업무 하시는 다른 직원분들도 있답니다. 카톡으로 소통하지요. 외로이 일한다는 건, 실제 동료가 옆자리에 없다는 말입니다 :) 여러분은 동료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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