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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유급휴가

이삿날에도, 캠핑장에서도 출근합니다.

우리 회사는 휴가가 없다. 5인 미만 사업장이라 근로기준법상 연차 유급 휴가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하루를 쉰다면 그날의 일당은, 없다.


아니 이게 무슨 15년 차 사회생활 거꾸로 돌아가는 소리래. 처음 이런 사규를 알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들은 일단 '5인 미만'이 아니었고, 당연히 월차니 연차니 뭐 그런 휴가라는 게 있었으며 아껴놨다가 명절에 붙여 쓰거나 여름휴가를 길게 쓰기도 했다. 더구나 회사에선 그해 휴가를 안 쓰면 결국 급여로 돌려주어야 하니 있는 휴가들은 가능한 다 쓰라고 독려하곤 했었다.

그런데 나의 일터는, 이제 막 시작하는 회사인 만큼 사규도 참 귀여운 면이 있는 것이었다.

거참 그럼 나 이제 언제 쉬어?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한 법 규정을 설명해주시는 대표님 앞에서 내 입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네~ 아 그렇구나. 네네. (심지어 웃으며)


지난여름,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이삿날의 그 어수선한 분위기는 한 번이라도 이사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전날까지 버릴 거 다 버려두고, 자잘한 정리를 마치고 나면 당일 아침 8시부터 이삿짐 업체에서 들이닥쳐 포장을 시작한다.

나는 이사 하루 전날에도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아니 3시쯤까지 근무를 했고, 이사 당일에도 업무시간은 변함이 없었다. 우리 대표님은 미리부터 내 걱정에 이삿날 힘들 거 같으면 마음 편히 다른 직원에게 내 일을 부탁하고 쉬라고 말해주긴 하셨다. 하지만 내가 그럴 것 같아? 놉. 어차피 다른 사람이 내 일을 그날만 처리해준들, 내 일이 무슨 일회성 단순 업무도 아니고 어차피 그다음 날 내가 다 이어서 처리해야 할 것들이었다. 오히려 그걸 다시 다 전달받고 다 이해하고 정리해야 하는 건 내 몫이다. 게다가 월급도 줄어든다. 절레절레 고개가 절로 흔들어졌다. 그렇게 이삿날 아침 8시, 출근을 했다.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이삿날 근무


결혼 후 몇 번의 이사를 해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예전엔 아이들이 어려서 애보느라 정신없는 애미였다면, 이번엔 노트북 들고 이 방 저 방 쫓겨다니며 빈자리 찾아 열일하는 쭈그리 커리어우먼이었다. 방학이라 애들은 아침 일찍 친정으로 보내 둔 워킹맘. 여기서 알게 된 사실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집중이 꽤나 잘됐다는 거다. 으쓱.

물론 종일 이러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오전에 해야만 하는 급한 건들부터 이렇게 처리해두고(이삿짐 포장 초반엔 내가 곁에서 버릴 물건 구분도 해주는 등 할 일이 좀 있었기에 이렇게 불편하게 일한 상황) 일단 접었다. 그리고 부동산 잔금 등 볼일을 다 마쳤고, 나머지는 이삿짐센터 실장님과 남편에게 맡긴 채 이번엔 카페로 향했다.


커리어우먼 놀이


그래도 집 앞에 스타벅스가 있다. 다행이다. 눈치 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곳.

매일 집에서만 일하다가 이렇게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더 근사한 여자가 된 기분도 들었다. 좋아하는 바닐라라떼와 샌드위치를 사서 한 입 베어 물고 일을 시작했다. 일에 집중하니 멋이고 뭐고 없었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신들린 듯 타자를 쳤다. 아, 이게 진짜 일하는 여자지. 캬.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나도 참.

남편에게 새로 이사 가는 집에 가구 잘 들이라고, 잘 보라고 해두고 나는 계속 일을 했다. 역시 바쁘게 일하는 날은 시간이 빨리 간다. 어느새 서너 시간이 훅 지나갔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마쳤다. 너그러운 대표님은 걱정하며 퇴근을 독려했다. 내 일을 내가 한 것뿐인데, 괜히 뭘 더 좀 잘 한 기분이다. 가끔 부러 카페에서 일해야 하나, 싶다.




한 번은 가족 캠핑을 갔다. 일하기 전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신랑을 따라 이 섬 저 섬 많이도 다니던 우리였는데, 본격적인 직장인이 되고부터는 통 가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이번에도 섬으로 가려니 1박으로는 모자랐고, 고민 끝에 월요일 하루를 끼기로 했다.

애들 학교야 체험학습으로 해결할 수 있고, 남편은 자유로운 사업가니. 내 일만 괜찮으면 되었다. 처음엔 힘들다고 안된다고 했지만, 오래 기다린 신랑과 아이들이 걸려 결국 오케이 해버린 것이다. 노트북으로 일하면 되지. 대신 일할 때는 절대 방해하면 안 된다?! 다짐을 받고서 캠핑장 예약을 덜컥, 해버렸다.


우리의 캠핑은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2박 3일. 금요일은 평소처럼 2시까지 업무를 마치고 정상 퇴근, 짐을 싸서 토요일 새벽에 출발했다. 참 멀기도 하지. 전라남도 신안군 저- 끝에 있는 섬까지 다리를 건너 건너. 바닷가에 있는 조용한 캠핑장에 도착했다. 바다여도 다 같은 바다가 아니다. 남쪽 바다는 더 예쁘다.

그렇게 토요일과 일요일, 온전한 캠핑을 즐겼다. 드디어 월요일이 되었다.


보통 캠핑장 퇴실을 해야 하는 날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일어나서 간단히 씻고 아침을 해 먹고, 설거지도 한다. 애들은 방방장으로 이른 출근을 시키고, 어른들은 마지막 감성 일지 모를 두어 개 남은 믹스를 탈탈 털어 주전자 보글 끓여 커피 한잔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잔짐을 정리하고 힘을 모아 텐트를 접는다........ 여기까지가 보통의 캠핑장 마지막 날 풍경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고, 옆 텐트에선 아직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7시 30분, 남편이 끓여준 짜파게티를 먹으며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전기도 들어오고 와이파이도 빵빵한 고마운 캠핑장.

 

밖에서 먹으면 더 맛있는 짜파게티. 극성스레 챙겨간 시어머니표 알타리가 신의 한 수다.


맛있게 먹고 나니 8시다. 미안하지만 설거지도 좀 해줄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늘은 프리패스다. 나는 휴가 없는 재택러니까. 어디서든 일할 수 있고, 신랑은 이해하고, 도와준다.

이것도 참 묘한 게, 일하긴 싫지만 설거지를 안 해서 좋았다. 내 속이지만 나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이렇게 가끔 모르겠을 때가 있다. 설거지만 안 했나? 텐트 정리도 안 했다. 남편이 다 했다. 물론 난 역시 출근시간 땡 하자마자 너무 바빠져서 신랑이 얼마만큼 치우고 있는지,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그날 유독 그랬다.

처음엔 텐트 안에서 난로 옆에 앉아, 아침 먹고 난 테이블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텐트를 접는다고 밖으로 내보내지고, 야외에서 일했다. 이왕 앉는 거 바다를 향해 앉았다. 아침 햇살에 노트북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지만 괜찮다. 글자를 읽을 수만 있으면 된다. 어쨌든 이날 할 일을 잘 마치는 게 중요하다.



집중해 일하는 사이 등 뒤에선 많은 가족들이 하나 둘 떠났다. 중간중간 돌아볼 때마다 한 텐트씩 사라지는 풍경이 흥미로웠다. 몰입의 힘은 대단하다. 아이들도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한 명 한 명 헤어지며 아쉬움을 뒤로한다. 우리 텐트도 사라졌다. 텅 빈 데크. 이제 출발할 시간.

가면서도 그날은 긴박했다. 차 안에서도 내 무릎 위엔 노트북, 컵홀더엔 업무용 전화기가 꽂혀 있었다. 이동 중이니 인터넷은 모바일 핫스팟으로 잡는다. 이 날따라 전화도 자꾸 온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사무실인 척. 멋진 척 일했다. 한층 고무되어 일한 그날의 나의 마음은 뭐였을까. 사실 평일에 놀러 가서 일에 지장 준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웬 자존심이람. 뭐 평소에 실수 한번 안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흥.

중간에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다시 올라오면서까지 일은 이어졌고, 멀미 나지 않게 잘 조절한 덕에 무사한 컨디션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퇴근 후 정신 차리고 보니 달리는 고속도로 위였던 그날, 앞으로 캠핑은 1박으로만 가야겠다 다짐했다. 아니면 대체휴일 껴서 2박으로...




나의 그녀 우리 대표님은 FM이다. 하지만 그 안에 융통성과 카리스마, 동시에 온기와 다정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하나 규정을 세워가면서도 어떤 면에선 정말 예상치도 못하게 직원을 챙기고, 배려해 주신다. 그 흔한 연차 하나 맘 편히 못쓰는 사규 속에 있기도 하지만, 정해진 근무 외의 초과 수당은 꼬박 챙겨주며 애들 육아 고민까지도 진심으로 함께 걱정하고 고민해 주신다.

이런 곳에서 함께 시작하는 5인 미만 중 한 명이어서, 사실 많이 설레고 그저 좋다. 앞으로 우리 회사는 5인이 뭐야, 50인 500인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언젠가, 곧, 머지않아 나에겐 그 이름도 찬란한 유급휴가란 것이 생기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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