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우리는 모니터만 바라봤다

by 미냉

고3 담임이 되면 학기 초부터 부지런히 상담을 시작합니다.

3월입니다. 아이들은 아직 성적표는커녕 무슨 과목을 배우는지도 잘모르는데, 학교는 상담부터 하라고 합니다. 모든 학년이 상담을 하지만, 고3 상담은 좀 다릅니다. 꼭 마지막에 입시라는 녀석이 따라붙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성적으로 학생의 미래를 점쳐보는 시간이죠.
“지금 성적이면 여기, 조금 떨어지면 여기, 조금만 오르면 여기까지 가능해!”
점집을 차려도 잘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는데, 서로의 마음이 급해져 뭔가를 정해 버립니다.


가장 난감할 때는 진짜 가고 싶은 대학이나 학과가 전혀 없는 학생과 마주할 때입니다.

제가 질문을 열 개쯤 던지면 학생은 겨우 한 마디 할까 말까 합니다.

처음 고3 담임을 맡았던 저는 그 짧은 대답에서 필사적으로 단서를 찾으려 했습니다.

수험 사이트를 함께 뒤져보고, 성격 유형 검사지를 꺼내서 강제로 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때 제 모습은 거의 형사가 따로 없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런 무리한 시도는 대부분 어색한 침묵 속에 허무하게 끝나곤 했습니다.

관계를 돈독히 하려던 시간이 오히려 어색함만 쌓였습니다.

그렇다고 빨리 끝내지도 못했습니다. 상담이 너무 짧게 끝나면 학생이 상처받을까 걱정됐으니까요.


그렇게 몇 년을 더 고3 담임으로 보내면서 저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교사는 점쟁이도, 형사도 아니라는 사실을요.
상담 자리에서 억지로 정한 학교와 학과는 막상 수시 원서를 쓸 때쯤이면 십중팔구 바뀌어 있었습니다.

결국 제가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길을 정해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학생이 원하지 않으면 입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제 본 드라마 얘기, 다니는 학원의 수업 얘기, 요즘 유행하는 음악 얘기 같은 걸 합니다.

학과를 고르지 못한 학생에게는 가벼운 적성 탐색 사이트나 책 한 권 정도를 추천하며 마무리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정말 필요할 때 다시 슬쩍 찾아오더라고요.


고3 담임은 ‘어떤 학생을 어디로 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능력은 애초에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이걸 깨닫기까지 제가 상담에서 실패한 횟수는 셀 수 없습니다. (정말 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상담을 억지로 끌어가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들이 준비가 되면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뭐, 아직도 잘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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