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마다 어김없이 열리는 연수가 하나 있습니다.
생활기록부 담당자 연수지요.
두 시간은 기본이고, 자리는 항상 꽉 찹니다.
연수자는 바뀌는 지침을 조목조목 짚어줍니다.
운동특기생 출결 처리, 위탁교육 인정 기준,
교과 이수 단위 계산법, 자율활동의 세부 항목까지.
듣다 보면 ‘평생 한 번도 안 쓸 수도 있겠다’ 싶은 항목들이 쏟아집니다.
그걸 듣고 돌아오면, 학교에서 다시 연수를 해야 합니다.
제가 다시 다른 선생님들에게 전달해주는거죠.
처음엔 고민했습니다.
‘이걸 다 전달해야 하나?’
중요한 것만 추리면 양이 많이 줄어들 것 같은데
혹시나 싶은 마음에 덜어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결국 … 거의 줄이지 못한 채 다 전달했습니다.
PPT에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넣었고,
저는 그걸 하나하나 읽었습니다.
지루했고, 집중도 어려웠습니다.
그건 제가 수업시간에 절대 하지 않는 방식이었죠.
그런데도 선생님들은 다들 조용히 듣고 계셨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하지만… 눈빛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꼭 이렇게까지…?’
그 연수를 몇 해 반복했지만, 정작 저는 방식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똑같이 자료를 만들고, 똑같이 읽었고,
똑같은 침묵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다 휴직 직전 해, 더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해에는 처음으로 방식을 바꿨습니다.
“생활기록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선생님들 모두 잘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대입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자료이니 만큼 꼭 책임감을 가지고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재요령 책자를 꼭 곁에 두시고 자주 찾아봐 주세요.”
그 이야기를 조금 더 길게, 진심을 담아 전했습니다.
입시에 활용되는 공식 문서이기도 하고,
학생에게는 평생 남을 수 있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식은 지침에 맞게,
내용은 의미 있게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기록을 하기 전에, 반드시 기재요령 책자의 해당 항목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20~30분은 훌쩍 지나 있었고,
예전처럼 조목조목 지침을 읽어주던 시간은 없었습니다.
대신 덧붙였습니다.
“생활기록부 정정은 정말 귀찮고, 꽤 힘든 작업입니다.
처음 쓸 때 잘 쓰고 입력하기 전에 오류를 발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뒤에야
작성 지침은 간단한 요약본과 검색 가능한 사이트 주소로 안내했고,
PPT도 없었고, ‘작년과 달라진 점’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연수는 원래 한시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예상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여유롭게 짐을 챙겨서 퇴근을 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말을 마무리할 즈음, 선생님들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습니다.
그 연수가 끝나고, 퇴직 후 기간제로 오신 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제게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여태까지 들은 생기부 연수 중에 제일 좋았어요.”
아마 짧게 끝내드린 데 대한 감사였겠죠.
그런데도 그 말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습니다.
몇 해 동안 비슷하게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연수였는데,
조금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약간의 불편함도 남았습니다.
‘어쨌든 나는 말했다’는 식의 자기만족을 벗어나
더 나은 전달 방식을 고민한 결과였지만,
동시에 선생님들을 믿고 책임을 미룬 건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전보다 덜 말했고, 구체적인 지침을 짚어주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방식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정보를 줄이는 대신 태도를 강조하고,
규칙보다 신뢰를 말했던 그 시간이
진짜 연수 같았던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불편했지만 편안했고,
덜 알려주었지만 조금은 더 나눌 수 있었던
그해의 연수는, 그렇게 제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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